간호사가 꿈인 서류미비 신분 19세 한인여학생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졸이는 우리의 이웃이 있다. 단지 서류미비자란 이유만으로 취업이나 여행의 자유는 물론 가족과 함께 사는 기본적 권리마저도 그들에게는 꿈만 같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답답하고 억울한 삶을 사는 이들은 부모의 뜻에 따라 미국에 들어온 서류미비 청소년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분’이란 벽에 가로막혀 고등교육이나 취직에 대한 희망을 버린 채 절망 속에서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의미없이 흘려보내고 있다.
유일한 희망은 서류미비 청소년들에게 합법 신분 취득 기회를 제공하는 연방상원 법안 ‘드림액트(주1)’의 통과다. 이민 신분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자아실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 대부분이 오직 이 법안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카고에서 중고교를 마친 한소영(가명, 19)양도 그렇다. 그 역시 드림액트에 앞으로의 인생을 모두 걸고 있다.
소영양은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 1988년 한국도 미국도 아닌 제3국에서 태어났다. 일명 ‘88올림픽 베이비’이지만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현지에서 서로 만난 그의 부모가 지난 2001년 시카고에 들어오기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 지금은 서류미비 신분이 되면서 한국으로 여행할 생각은 아예 접었다.
현재 소영의 부모는 모두 캘리포니아에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이민국의 단속을 피하고 월급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자녀들 교육비에 보태려는 생각에서다. 시카고에선 외할머니가 식당에 나가면서 남아있는 소영양 자매들을 돌본다. 올해로 나이가 16살, 11살인 동생들은 아직 자신들이 서류미비 상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집이 좀 어려운가보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정도다.
몸이 아픈 할머니가 매일 고된 식당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소영의 가슴은 미어진다. 언제나 웃음 짓는 할머니지만 힘들어도 손녀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고 있다는 걸 소영은 알고 있다. 멀리 캘리포니아에 있는 엄마, 아빠와 하루에 한 번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오늘도 무사하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면서도 가끔은 서러워 목이 멘다. 오직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하는 부모님. 그 큰 희생을 알기에 속 안 썩이는 착한 딸이 되고자 하지만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는 현실에 때로는 부모님이 그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변 상황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0대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나 가혹하다. 자신의 처지와는 달리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고 있는 또래를 볼 때면 초라한 자신이 창피해진다. 특히 같은 서류미비 신분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는 부모 덕분에 걱정 없이 지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한다. 드림액트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소영과 달리 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외면만 하는 게 섭섭하다못해 밉다.
쥐구멍을 찾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울 때도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소영이 어떤 신분인줄을 모르고 사람들이 서류미비 이민자를 농담 주제로 삼을 때나, 드림액트 지지 운동 중 같은 한인이 우리 가족 중엔 너희 같은 불체자가 없다며 서명조차 거부할 때만큼 비참한 경우가 또 없다. 결국 며칠 전 엄마와 통화하면서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버렸다. 나 힘들어요 엄마.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어. 엄마 아빠가 너무 미워... 목 놓아 우는 딸의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삼켰다.
가끔 투정을 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영은 믿음직한 장녀다. 부모를 대신해 할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돌보면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돈을 벌어 동생들 학비에 보태려면 간호사가 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부를 마쳐도 큰 병원 취직은 불가능하겠지만 일부 요양원에서 파트타임식으로 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분 문제가 있지만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조금씩이라도 벌어서 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소영은 특히 둘째 동생이 영재학교에 다닐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금 소영의 가장 큰 목표는 ‘드림액트’의 통과다. 일단 통과만 되면 소영과 동생들 모두 영주권을 받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다. 또 더 이상 불안에 떨면서 지내지 않아도 된다. 고교 시니어였던 작년 내내 그가 대학 진학 준비보다는 드림액트 지지 운동 자원봉사자로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특히 내년의 대선을 고려하면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죽을 힘을 다해’ 드림액트 통과 운동을 벌일 생각이다. 이제 남은 날은 대략 60여일. 소영은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드림액트 운동에 다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달라는 것. 어렵지 않아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요. 드림액트에 찬성한다는 엽서에 그냥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사인만 하시면 돼요.
그러면서 앳된 얼굴의 소녀는 한인 ‘어른’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H마트나 대형 교회 앞에서 엽서를 나눠줄 때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해가듯 외면만 하세요. 심지어 ‘이런 것 주지말라’고 화를 내거나 ‘우리 가족은 이런 것 없어도 된다’고 면박을 주기도 하죠.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럴 때면 같은 한인이면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자신이 너무 비참하기도 하고... 손으로 눈가를 훔치던 소영이 결국 고개를 떨궜다.
봉윤식 기자
*주1
드림액트는 서류미비 청소년들에게 합법 신분 취득 기회를 제공하는 상원 법안으로서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졸업하고 대학이나 군대를 2년 이상 근무하면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법안의 혜택을 받으려면 16세 이전에 미국에 입국한 뒤 5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 법안이 제정되면 한인 학생을 포함해 71만5천명의 서류미비 학생들이 혜택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이와 유사한 하원 법안으로는 학생 신분 조정 법안(Student Adjustment Act)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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