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일본 대신 왜 한국이 분단되었나
일본과 서양의 교류 우리보다 400년 앞서
미국의 입장에선 문화선진국 일본 존중
-문화와 무력
필자는 1990년대 초 뉴질랜드에 근무했다. 이웃나라 호주와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방식을 자연스럽게 비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영국은 1600년대에 호주를 발견했는데 원주민들의 문화수준이 매우 낮아 이들을 말살하는데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1700년대에는 호주 인근 뉴질랜드로 이민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원주민인 마오리족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마오리족들은 통일된 국가가 아닌 석기문화의 수많은 독립 부족체제였지만 나름대로 자긍심이 높고 문화수준과 군사력이 상당해 이들을 호주 원주민(aborigin)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마오리족이 이해하지 못하는 ‘주권’을 영국 국왕이 갖는 대신 토지권과 어업권은 마오리족에게 주는 ‘와이팅기’ 조약을 1800년대에 체결, 뉴질랜드를 영국 영토에 평화적으로 편입했다. 마오리족은 세월이 흐르면서 헐값에 대부분의 토지를 영국인들에게 넘겼으나 지금까지도 어업권은 모두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약에 따라 영국인들과 대등한 권리를 갖는 시민으로서 살아왔다. 이 또한 문화의 힘이 아니겠는가.
-축적된 문화의 힘
필자가 국제정치 문제에서 오랫동안 가져온 의문 가운데 하나가 2차 대전의 전범국이고 미국을 침략한 일본이 아니라 왜 한국이 2차 대전 후 분단되어야 했는가 이다. 냉정하게 말해 일본이 우리보다 400여년 앞선 1400년대부터 서양과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웠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서양인들을 일본문화로 매료시킨데 있었지 않나 생각될 때가 있다.
미국은 문화선진국으로 여긴 일본을 소련에 양보할 수 없었던 반면, 후진국으로 간주한 한국의 절반을 소련에 내주는 것에 대해서는 미 정부 내에서 허망할 정도로 쉽게 결정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애치슨 라인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한반도의 분단은 1945년 미국의 결정 이전인 1943년 영국 외무부 내의 전후 처리 자문기구인 아·태 소위원회(위원장 아놀드 토인비)의 구상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1400년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문물을 배우면서 수많은 저작과 번역을 통해 일본을 세계에 알렸다.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은 일본인의 눈과 일본 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형성됐고, 우리에게 조국의 분단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밀려온 것은 아닐까.
미국 국무부는 자신들이 잘 안다고 믿었던 일본의 전격적인 침략에 놀라 2차 대전 종전 무렵 전후 일본문제 처리를 위해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베네딕트 여사에게 일본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의뢰하였다. 불과 몇 달 만에 나온 보고서가 ‘국화와 칼’이라는 저작이다. 일본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천황이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보고서였다. 일본은 전후에도 천황제를 유지하고 막대한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다시 세계 선진대열에 쉽게 합류했다.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국의 하나인 한국은 오히려 일본을 대신한 속죄양이 되어 국토가 두 동강이 나는 형편에 빠졌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을 가 본 적도 없고 일본 말도 못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에 관한 고전으로 읽히는 책을 단기간에 써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일본이 음으로 양으로 미국사회에 축적한 문화적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필자가 좋아하는 책 가운데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 (Rene Grusset)가 쓴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Empires of the Steppes)가 있다. 한반도와 그 위 연해주 지방에서부터 만주, 몽골, 중국 북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유럽까지를 잇는 대초원을 지배했던 민족들의 역사를 집약한 책이다. 2,000여년의 세월과 방대한 지역을 대상으로 수많은 원 자료들을 섭렵해 깊이 있고 일관성 있는 맥락으로 기술한 매우 감동적인 대역사서이다. 어떻게 한 개인이 그런 책을 저술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저자는 이에 답하듯 “이 책은 결코 나 혼자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수백년에 걸쳐 축적된 프랑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문화란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축적되는 것이며 그 축적된 힘은 이윽고 필요한 시기에 그 성과를 내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탈레반의 문화재 파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문화·인종적 우월감도 배타성 지나치면 위험
-문화와 국제 윤리
냉전이 종식된 후 “민주국가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제시돼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필자는 이에 덧붙여 문화국가간에는 상호 식민지배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윤리적 원칙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에 위배되는 사례의 하나가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가져왔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데 이어 1910년에는 한국을 강제 합병하고 문화 열등국으로 간주, 심한 식민통치를 자행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눌렀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들은 일제통치가 끝난 지 6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식민통치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라고 일본에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한국을 일본보다 열등한 문화로 이해하는 서양인들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줄기찬 사과 요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서양의 식민통치를 받은 국가들은 과거 식민 종주국에 대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데 왜 유독 한국만 일본에 대해 그러느냐고 적지 않은 미국·유럽인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우리 한인들은 돌이켜봐야 한다. 그런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문화적 우월감과 배타의식
문화적 우월감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과 달리 그릇된 문화적 우월감이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가는 나치 독일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민족적 통일이 늦었고 문화발전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비해 쳐진 편이었다. 뒤늦은 통일은 강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잉태하였고 히틀러는 이를 악용해 게르만 민족의 문화적, 인종적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유대인 등 타인종을 말살하려고 시도했다. 15세기 르네상스, 18세기 계몽주의와 민주 시민혁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최고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던 유럽에서 20세기에 어떻게 이런 대규모 야만행위가 자행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독선이나 그릇된 문화적 우월감을 방지하려면 항상 다른 여러 인종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들과 더불어 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슬람과 다른 종교 문화라는 이유로 1500여년 전에 암반에 조각된 바미얀 계곡의 거대 불상들을 폭파해 버린 아프간의 탈레반의 행위는 반인류적, 반종교적, 반문명적 행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문화의 힘은 전쟁을 방지하고, 정복자를 오히려 정복시키며 주권을 유지해 주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 준다.
4. 세계 속의 한국문화
-우수한 한국 문화
한국은 세계 주요 중심 문명인 중국 문명권에 일찌감치 속해 있던 관계로 서기 500~600년께 이미 세계적으로 상당히 앞선 문화를 누려 왔다. 서기 300년대에 중국을 통해 불교를 도입하였고 역시 중국의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 당시로서는 앞선 철학을 받아들여 정신세계를 풍부히 해왔다.
물질적으로는 일본인이나 유럽인들이 그토록 선망하면서도 만들지 못하던 당시의 첨단 제품인 자기(porcelain)를 우리는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서기 900년께 만들어냈다. 일본은 1592년에 시작한 임진왜란 때 수백명의 우리 사기장들을 납치함으로써 비로소 이들을 통해 도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유럽은 중국에 파견한 신부들이 입수한 기밀을 통해 1700년대 비로소 독일 마이센에서 그 제작에 성공하였다. 토기, 옹기 등 저온에서 굽는 도기와 달리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정제된 흙으로 제작한다. 유약 없이도 물이 전혀 새나가지 않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들은 중국을 통해 자기를 접한 뒤에는 부유층이 너도나도 갖기를 선망했다.
우리는 또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200여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고 인류 문화사에 길이 빛나는 한글을 1446년에 반포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1392~1910) 동안 집권층의 폐쇄성과 중화사상으로 인해 한국 예술의 우수성이 사장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유종열(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한국의 미’가 재발견돼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맞았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을 통해 실학사상이 들어오고 한국적 르네상스(영·정조시대)를 잠시 가지기도 하였으나 집권층의 좁은 식견으로 인한 기독교 탄압과 실학파의 숙청으로 문예부흥의 기류가 계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미국 등 선진 문화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그 중심에 미주 한인들이 있다는 것은 한민족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이슬람과 다른 종교 문화라는 이유로 1,500여년 전에 암반에 조각된 바미얀 계곡의 거대 불상들을 폭파해 버린 아프간 탈레반의 행위는 반인류적, 반종교적, 반문명적 행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파괴되기 전의 바미얀 불상과 파괴된 후의 모습.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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