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간판을 걸고 희생자 할머니들의 평생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일본정부의 양심있는 공식 사과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이 꼭 15년 전의 일이었다. 1992년 12월로 그때 내 나이 59세였다.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부흥개발은행(통칭 세계은행)에 근무 중이었다. 25주년 근속을 몇 달 남기지 않고 있을 때였다.
나는 30세 중반에 미국에 와서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으니 가정을 가진 여성으로서 특히, 네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시어머님을 모신 며느리로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천생 타고난 불굴의 한국의지가 아니었던들 어찌 그 힘든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을 해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40대, 50대를 맞고 있다. 제각기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키우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안 있으면 큰 손녀딸의 열여섯 살 생일이 다가온다. 그런데 내 가슴이 요사이 왜 이리 설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손녀딸 ‘Sophie’의 이름을 나는 혼자 마음속에 또 하나 지어 주었지. ‘소희’라고. ‘소희’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 숙녀로 등단하는 기쁜 날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는 그날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다. 오히려 어떻게 소희의 ‘우아한 숙녀됨’을 찬양하고 축복해 주어야 할지 걱정만 태산 같다.
십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정신대 생존자 할머니 한분을 모시고 미 법무성의 로센바움 특별수사국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로센바움 국장은 세계2차 대전의 전범자들의 은신처를 세계 방방곡곡 샅샅이 뒤지면서 그들의 범죄 처벌을 위한 색출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분이다. 그분의 관심이 2차대전시의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만행과 그 전범자들의 처벌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그는 정신대 희생자들과 그 생존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을 쏠리게 되었다. 일본군에게 끌려갈 때 열세 살이었던 한 할머니와의 만남을 그분이 몹시 희망하여 그 할머니와 로센바움 국장과의 만남을 내가 주선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의 미 법무부 그분의 집무실에서였다. 차마 인간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 속에 어린 소녀시절의 꿈을 처참하게 짓밟힌 그 할머니의 이야기, 그 실화를 본인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우리 모두는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숨소리마저 송구스럽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갑자기 세상이 머문 듯, 침묵의 시간이 꽤 흘렀었다.
얼마가 지난 후, 유리컵에 냉수 한잔을 떠서 손수 할머니에게 갖다드리고 나서 할머니를 정중하게 껴안아드린 후 로센바움 국장은 이렇게 할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내게 딸이 둘이 있습니다. 지금 여섯 살과 여덟 살입니다. 그 애들이 커서 먼 훗날에 숙녀의 나이가 되면 나는 그때에 할머니 이야기를 내 딸들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부탁을 이렇게 할 것이에요. ‘우아한 숙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만난 할머니처럼 영예와 자존심을 소중히 여기는 훌륭한 인간으로 자라줄 것’을 꼭 당부할 것입니다.
나는 가슴속에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대문제를 에워싼 정의 회복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국제적으로 겪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특별히 일본의 정신대문제 반대운동가들에게 겪은 고통이 한꺼번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 느꼈다. 아, 우리나라 정부 관리 중에 로센바움 국장 같은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 하는 아쉬움에 한동안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멋있는 분을 내 평생에 만날 수 있었다는 일이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금년에 로센바움 국장의 큰딸이 아마도 열여섯 살 되는 해이겠다. 그녀는 아빠에게서 할머니 이야기를 듣겠지. 그리고, 미국에 a lady of honor and pride가 또 하나 탄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를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소희에게는 어떻게 a lady of honor and pride에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을는지 걱정이 태산 같다.
소희가 열여섯 살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설레기만 하고 있는지. 내가 열여섯이 되는 것도 아닌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