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자랑하는 민주화의 길, 그 가시밭 길을 목숨 걸고 지켜 온 두 정치 거인. 영남의 거산(巨山) 김영삼과 호남의 후광(後廣) 김대중. 두 분은 동지였다. 어두웠던 한국의 헌정사를 희망으로 함께 이끈 경쟁적인 동반자였다. 홀로라면 살아남기 어려웠던 3공, 유신의 철권정치가 난무할 때, 두 분은 서로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어 주었다. 미국 망명과 단식 투쟁으로 정치 생명을 지켜야 했던 5공시절에는 더더욱 그랬다. 반세기를 두고 지켜보아 왔던 두 분의 속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산과 후광이 어느 때 큰 목소리를 냈던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욕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함께 살기 위한 몸짓일 수도 있다. 우두머리는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항상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려야 한다. 때로는 싫어도 싸워야 한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승패를 주고 받던 사이, 서로의 다함 없는 성취마저 지켜볼 수 있는 사이. 너무나 부러운 거산과 후광이 함께 걸어 온 발자취, 경쟁하며 나누었던 삶의 자리이다. 그런데 두 분은 지금도 싸우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이 요즈음 ‘훈수정치’에 분주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DJ)을 두고 “발악하고 있다”는 등 독설을 퍼부었다. 5월 28일 오전,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한나라당 H의원의 큰 절을 받는 자리다. YS는 “(DJ는) 정권을 이제 빼앗기면, 정권 교체가 되면 자기가 죽는 줄 안다. 하도 부정한 게 많아서 말야” 하는가 하면 “자기가 발악한다고 발악한 대로 되느냐. 이게 다 정해져 있는데 참 불쌍한 사람이다. 지금 말할수록 더 안되게 돼 있는데.”라고 말한다(5/29 본보 참조).
YS는 왜 저렇게 격한 말을 쏟아낼까. 정치 10단의 경지에 이른 눈으로 볼 때 DJ ‘훈수정치’로 뭐가 될 듯한 낌세를 느끼기라도 한 것인가. 하기사 DJ의 ‘훈수정치’는 국가 원로의 덕담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보다 구체적이고 의욕적이다. 가관인 것은 12월 대선 예비후보라면 모두가 DJ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목을 빼고 손 잡아주기를 원한다. 또 한번 “호남의 김대중 선생님”으로 모시겠다는 조아림을 드린다. DJ의 뜻과 주장은 분명하다. 햇볕정책을 펴고, 남북 교류협력을 통해 이룩한 지난 10년의 공든 탑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또다시 155마일 휴전선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어야 하는 제2의 분단 사태만은 기필코 막겠다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민주개혁 세력이 4분5열되어 중심을 잡아줄 당은 고사하고, 내세울 얼굴 하나 없는 처지이니 속이 타고 손발이 떨릴 것이다.
DJ는 평소, 올 대선은 “여야 1대1 대결로 가야 한다”며, 범여권의 대통합을 말해왔다. 지난 5월 28일에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의견을 나눈다. “통합이 지지부진해 답답하다.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했고,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누구 한 사람이 나타나 정국을 리드하거나, 사생결단해서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고 까지 당부한다. 그는 또 “단일정당을 구성하고 안되면 연합체를 구성해야 한다. 이도저도 안되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고 절박한 심정을 드러낸다. ”남북 정상회담도 8.15 이전에 성사”되어야 한다고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한다.
DJ는 대선 정가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되었다. 지역주의 부활을 탓할 수야 있겠지만, DJ 말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다.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을 법한 퇴임 대통령 DJ의 흉금을 YS 말고 누가 알 것인가. 그렇다 해도 이것들 뿐이라면 YS는 못 본 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YS 심기는 편치 않다. 지난 4월 보선에서 당선한 DJ 차남 홍업씨의 행보가 겹친 것이 아닐까. 부럽고 욕심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차남 현철씨가 내년 4월 총선에 출마, 당선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2004년 총선 때 여론의 뭇매를 맞고 주저앉아야 했던 아픔이 되살아 나기도 할 것이다. 아직도 ‘골목대장 기질’일 진대, 이야말로 열불 날 노릇이리라.
“동교동 김부자”의 솜씨가 호남을 찍고 충청을 거머쥐려 하는데, ‘상도동 김부자’ 의 마음인들 “우리가 남이가”를 잊을 것인가. ‘김 소통령’의 내년 총선준비를 위해서도 YS의 목소리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소통령’ 총선 출마반대 목소리를 초장에 꺾어야 한다. ‘하의도 표심은 말이 없는데, 거제도 표심은 왜 말이 많은가?’ 그렇게 윽박질러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고 싸움일까. YS의 DJ에 대한 저간의 독설은 ‘국가 원로’로서 앞서겠다는 욕심이나 미움보다는 아들의 앞날을 위한 밑거름 뿌리기였을 수도 있다. 전남 하의도 표심을 치는 듯 경남 거제도 표심을 다스려 아들의 손 쥐어주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닐까. 후광(後廣)과 거산(巨山). 두 분다운 큰 울림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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