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열 서울관전 칼럼
올해 화두와 관계없이 지금까지 한국의 흐름을 보면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란 단어가 꼭 어울린다. 한국에서 가는 곳마다 화제의 중심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그러면 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슨 뜻인가? 사전을 찾아보니 ‘세계적인 표준’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표준’을 풀이한다면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갖는 눈높이라는 뜻이 아닐까. 또 다른 해석을 한다면 과정이 투명하고 거짓말이 적은 그런 상식적인 사회의 기준치를 말할 것이다. 한국 정부와 지도자들은 국민 년소득 4만 달러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처야 할 관문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연일 신문의 톱 기사로 장식 되는 한화그룹 총수의 멈추지 않는 뻔뻔한 거짓말 폭로와 경찰 지도부의 저질 대가성 보복폭력 은폐 과정(?)을 보면서 사회의 상식을 어디서 찾고, 지도자들의 부도덕과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3류급 사회 지도자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했던 글로벌 스탠더드를 국민이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원래 부정적인 뉴앙스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인데 연일 터져 나오는 사회 병폐 때문에 한국에서는 꼭 그대로 사용 되고 있지 않다. 필자가 지난 1년 여 한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세계화의 역방향인 군사문화가 한국인의 언행에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모체가 되는 합리적인 개성과 외국인에 대한 전향적인 포용을 찾기가 힘들다. 무엇 하나가 유행하면 언제, 어디서나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 한 예로 요즘 건강 유지와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가정주부 및 젊은 여성들의 걷기운동 열풍이 대단하다. 대충 저녁식사가 끝난 시간에 맞추어 국민학교 운동장에 가보면 너도나도 걷기에 정신이 없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가 일정한 간격으로 팔을 상하로 높이 들어 올리는 모습이 신기하게도 거의 똑 같다. 왠지 자연스럽지 않고 같은 동작이 너무 획일적으로 보인다. 근래 프랑스에서 돌아오신 분도 똑 같은 체험을 파리 공원에서 했다고 한다. TV에 특이하게 걷는 모습이 소개된 다음 한국 주부들은 하나 같이 군인 행진 같은 통일된 모습을 운동장에서 보이고 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게 비칠 수도 있고 그런 것이 흠이라고 심각히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인 가운데 잠재돼 있는 그런 군사문화의 잔재와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불식하지 못하면 글로벌 스탠더드가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다.
변화를 위해 시작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보다 효과적으로 받아 들이기 위해선 우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간단한 기본부터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
필자가 일본 여행 중 지하철 차내에서 느낀 특이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실내가 엄격히 정숙하다는 점이다. 움직이는 절에 온 것 같은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서울의 지하철은 무척 시끄럽다. 기차의 소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장사꾼이 수시로 들어와서 물건을 사라고 야단이고, 사방에서 핸드폰을 자기집 안방에서 사용하듯 큰 목소리로 마구 떠든다. 나이가 먹은 사람들은 청각이 나쁠 수도 있어 이해될 수 있지만 무절제한 10대와 20대들의 통화는 거의 소란에 가깝다. 전혀 남을 상관도, 배려도 하지 않는다. 어제 아침 8시 출근 열차에서 한 젊은 직장 여성이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일어난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큰소리로 이야기하니 주위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이 견디다 못해 목청을 높이면 그제서야 눈을 치켜들고 입을 실룩거리며 약간 소리를 줄였다가 또다시 시끄럽게 이야기 한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많은 나라인데 출근 길에서 열 받기 시작하면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뻔하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일이 아침마다 거의 비슷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두 나라 사람을 비교할 때 한국 사람들이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더 좋다”는 말도 한다.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지금 한국에서 가장 요구되는 교육은 우선 상식을 되찾는 일이다. 상식이란 보통사람이 이해하고 사리분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 상식인데 요즘은 꺼꾸로 부모가 염치도 모르는 자식에게 효도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70-80년대 부모는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회인을 배출시킬 교육을 시켜주면 자식에 대한 의무는 다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전부터 애프터 서비스(After Service)라는 이상한 단어가 부모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말은 자녀들을 출가 시킨 후에도 결혼관계가 잘 유지되기 위해 위급 시(時) 전략적 훈수와 금전적인 도움을 부모가 제공한다는 뜻이다.
더욱 적지 않은 자식들이 부모 집 근처에서 살며 맴맴 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아이들을 보아줄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친정 집 근처에 사는 것이 피(避) 할 수 없는 선택이며 시집 쪽에서 자진해서 아이보기를 자원하기 전에는 막을 수 없다. 설사 도움을 주려 해도 며누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지근(至近)거리에서 출가한 딸과 친정 엄마가 필요 이상으로 밀착되다 보니 장모가 자식들에 대한 독점권을 잡고 집안의 어른 대표로 위상이 변(變)하여 충돌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유엔 총장을 하고 있는 “반기문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고, 백수는 내 아들”이라는 시어머니들의 절박한 유행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이야기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은퇴한 부모가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자녀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비율이 세계의 어느 나라 보다 높다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 중 60대가 83%, 70대는 64%가 집을 떠난 자녀들 뒷바라지에 멍들고 있다는 현실이다.
자신들의 삶을 포기할 만큼 부끄러운 수치인데 반해 세계인의 평균치는 30% 미만이다. 그러나 숫자가 아닌 액수로 따진 비율이라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의 미덕을 손 꼽으라면 어른에 대한 공경과 자식 사랑을 최우선으로 하는 효도와 헌신이었다. 그래서 가족들 간의 끈끈한 정(情)이 한국인의 자부심이고 자랑이었다. 그런 가족에 대한 헌신이 중요한 정서이기 때문에 한국의 부모들은 즐거운 노후(老後) 생활은 커녕 돈에 관련된 가족들 불화의 중심(中心)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멀리서 살기 때문에 이처럼 자녀들 문제로 자신의 노후대책은 뒷전으로 하고 우선 자녀 돕기에 남겨둔 재산은 물론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 되는 것을 감수하는 부모들의 딱한 사정을 잘 모른다. 한국의 60대 가운데 50% 이상이 은퇴 후 가장 큰 걱정이 돈이라고 한다. 세계 노인들의 평균 삶의 질을 100으로 본다면 한국 노인들은 겨우 50에 불과하다.
결국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노인이 많고, 더불어 자살률도 낮지 않다.
자녀 뒷바라지에 재산을 거의 허비하니 노후를 준비할 수 없다. 그 흔한 노후 여행은 고사하고 기본 생활비가 부족하니 생전(生前)에 마지막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고 싶어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세계 평균 노인이 30% 사회봉사를 하는데 한국 노인은 훨씬 낮은 1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어쩌면 더 적을 것이다. 역행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자리잡기 위해선 우선 가정에서부터 세계인의 상식과 사고를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에게 비쳐진 오늘의 한국은 변해도 엄청나게 변화된 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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