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가 떨어졌다. 식상한 느낌이다. 피로감마저 전해진다. 이명박-박근혜 두 진영 간의 다툼 말이다. 반대 방향을 쳐다보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고건인가 했더니 아니다. 정운찬인가 했더니 그 역시 구름이 됐다. 일곱 달도 채 안 남았다. 대통령선거가. 그런데도 뚜렷한 주자도 없이 계속 암중모색이다. 한 마디로 지리멸렬 상태다.
체감경기가 엉망이다. 불확실성만이 판친다. 정치는 실망을 넘어 절망이다. ‘고도’(신인가, 구세주인가)는 과연 오는 것인가. 베케트의 작품이었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 올려진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참 오래간만이다. 그런데 뭐라고 했더라. 입이 째진다고 했던가. 뭐가 그렇게 좋아 노무현 대통령의 입이 째질 지경인가.
“경기가 요동친다. 계층 간 소득차가 심화된다. 물가에서 안보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원한 게 없다. 정치적 스테이터스 쿠오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다. 분노가 팽배하면서 대중은 구세주의 출현을 고대한다.” 역사학자 닐 퍼거슨의 지적이다.
오늘날 시대를 ‘신 데마고그(선동가)시대’로 정의했다. 1920대에서 30년대, 그러니까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대공황시기가 데마고그의 전성시대로, 오늘날의 시대가 그 때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이 선동정치를 가능케 하는지, 일반론적인 답을 제시한 것이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였다. ‘대중으로 하여금 분노케 하라’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적 만들기다. 그 적은 외부세력일 수 있다. 내부세력일 수 있다. 둘 다일 수도 있다.
인종주의를,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가진 자에 증오를 퍼붓는다. 좌우간 모든 재앙은 ‘내 탓’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거다. 그가 밝힌 선동정치의 본령으로, 라틴 아메리카, 중동, 유럽의 일부지역에서 팽배하고 있는 선동정치의 위험을 역사라는 관점에서 조망했다.
그 얘기가 그런데 어쩐지 남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어딘가 한국의 정치지형과 너무 닮아 보여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옥탄가가 높다. 조금만 열을 가해도 불붙기 십상이다. 이를 한국의 한 지성은 ‘민족 자폐증’으로까지 묘사했다. 민족주의는 그러나 한국의 정치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감성의 시대다. 세상이 온통 감성문화와 영상문화로 뒤범벅돼 있다. 읽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보고 느끼고 반응한다. ‘붉은 악마’의 시대로, 반지성적인 즉흥주의 시대다.
“꿈을 상실한 사회가 한국 사회다. 가난을 이겨내려는 꿈이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꿈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한 교육가가 던진 질문이다. 지도층이 제대로 비전을 제시할 때 그것은 사회의 꿈이 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이 된다. 그 꿈이 실종됐다는 진단이다.
여전히 민족주의에 갇혀 있다. ‘끼리끼리’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흥주의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 출구가 없는 현실에 답답해한다. 그 복잡한 정서, 그 민심의 일단이 표출된 게 4·25 재·보선 결과가 아닐까.
패배를 몰랐다. 적어도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는. 그러던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다. 왜. 부패했다. 비전 제시도 없다. 그런 주제에 오만하기만 해서라는 평가가 나왔다. 민심은 역시 무서운 것이라는 각주와 함께.
선거결과는 그러나 다른 흐름도 노출시켰다. 부패전력의 김홍업씨가 호남에서 승리했다. 아버지의 후광 덕이다. 게다가 충청도 지역당을 꿈꾸는 심대평씨가 대전에서 승리했다. 무엇을 말하나. 망국적 지역주의는 여전히 퍼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민심은 무섭다. 그러나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한말이었나. 하여튼 이율배반적인 결과다. 거기서 뭔가가 엿보인다. 동시에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신DJP연합에, 좌파를 하나로… 그렇게 잘만 하면’- 데마고그의 득의에 찬 표정이 겹쳐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입이 째진다는 술회와 함께. 그 발언의 앞뒤로 볼 때 아무래도 선거판에 끼어들고 싶은 모양이다. 어떻게 뛰어들까. 글쎄…, 두고 볼 일 같다. 대통령은 ‘전략의 달인’이라는 점은 유념하면서.
한 가지는 그러나 분명해 보인다. 꿈을 상실케 하는 한국사회의 야만성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야만성의 원천은 다름 아닌 정치권이다. 그 정치권이 막바지 대선정국을 맞아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마타도어에 데마고그의 바다로 빠져들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해서다.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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