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봄은...
새벽 잠에서 깨기 싫은 서울 거리에 나온 관광버스는 마지막 지각생 고객을 태우고 정류장을 슬그머니 미끄러져 나가자마자 바로 고속도로에 그 큰 몸체를 실었다. 가이드 관광의 고객은 대부분이 중, 장년층으로 형제 또는 자매 등 가족 단위가 주류를 이룬다.
4월의 첫 공휴일을 맞이하여 벚꽃이 만발한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로 떠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워싱턴 D.C의 벚꽃도 장관이지만 올해는 운 좋게 한국의 벚꽃을 보게 되어 여간 감사하지 않다. 진해 군항제와 함께 쌍계사 십리 벚꽃 길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관광지로 약 1천2백 그루의 가로수 벚꽃이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
특히 연례행사 벚꽃축제는 화계장터와 어울려 봄철엔 상춘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잔뜩 찌 뿌린 하늘을 뒤로 한 채 남쪽을 향해 달리는 차 속에서 간단히 요기를 때운 후 창밖에 시선을 집중하려 했지만 알 수 없이 흐린 날씨가 마음에 걸렸다. 그 당시에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그것이 바로 황사였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던 황사를 알지도 못한 체 제대로 겪은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 날라온 황사는 올해 중국에서 온 황사 중 가장 강력하고 큰 규모의 것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다음날 학교까지 휴교를 했다. 30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을 오늘 체험한 것이다.
쌍계사가 가까이 왔다는 가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다. 관광객을 태운 차들로 꽉 차버린 도로는 어느덧 거대한 정류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차 속에 앉아서 기다리기엔 창 밖의 유혹이 너무나 마음에 가깝게 다가 왔다. 수줍은 듯한 핑크색깔의 벚꽃이 “왜 빨리 나오지 않고 무엇 하느냐”고 재촉하듯 꽃망울을 활짝 열고 차 창가에 걸쳐 내려다 보고 있었다.
벚꽃의 성화에 조급한 몇몇 사람과 묵시적으로 버스에서 내려 화개 장터까지 걷기로 했다.
필자는 그 동안 숙련된 걸음을 재촉하여 만원이 된 화개장터에 도착했다.
화개장터는 매우 역사적인 장소이다. 옛날에 팔도 각지에서 모여든 보부상들이 물물 거래를 하던 곳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특히 지방색이 강했던 시절에도 혼사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영호남 구별 없이 이웃으로 사이 좋게 잘 살아온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이날 화개장터에서는 영남과 호남에서 짝지은 신혼 부부를 선발하여 전통 혼례를 치르고 제주도 관광 신혼여행권을 증정하는 행사도 있었다.
화계장터에서 쌍계사로 올라 가는 벚꽃 십리길은 섬진강과 어울려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기운을 느끼게 했다. 다음주부터는 시들기 시작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벚꽃의 꽃망울이 내 눈 속에서 더욱 교태를 부리는 듯 들어왔다.
남북에서 9번째, 남한에서 4번째로 긴 섬진강에 고려 때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는데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강 나루터에 몰려들어 진을 치고 울부짖는 통에 침범한 왜구들이 놀라 도망쳐 주민들이 무사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섬진강의 섬(蟾)자는 ‘두꺼비 섬’자이고 진(津)은 ‘나무 진’자이다.
나루터에 두꺼비가 나타난 강이라는 듯이다.
순박하면서도 인간과 자연을 가장 잘 나타낸 이름이기도 하다.
섬진강을 말하려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한 김용택 시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 지역 문인들과도 만남의 시간을 갖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시집 ‘섬진강 1’의 뒷 부분에서 섬진강을 이렇게 표현했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 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선조들이 남긴 삶의 마지막 발자취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말없이 구비 구비 흘러내리는 섬진강은 전북과 전남을 거처 경상남도 하동 땅 하류 화개장터에 접어 들기까지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80리 협곡, 하얀 백사장 등 숱한 풍치를 보여준다.
번데기 냄새가 진동하는 화개장터에는 원근각지에서 모여든 사람이 한데 어울려 익숙한 풍물놀이와 잊혀져 가는 막걸리로 텁텁한 목을 축이며 그 동안 숨겨 놓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필자가 지내온 30년의 이민생활 중에 만나 보기 힘든 정다운 사람들의 얼굴에 나도 함께 신이 났다. 신명 나는 전통풍악에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는 아낙네는 주름진 눈가에 그을린 얼굴이었지만 모든 시름을 잊은 듯 행복하게만 보였다. 사람 구경이 여행이라는 말처럼 오늘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잘 익은 봄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평화로움과 푸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며 매끄러운 물살이 흐르는 섬진강은 또다시 나를 부를 것이다.
올 여름에도 나는 다시 길이 꽉 막혀 버린 차도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하동 땅 찾아 섬진강과 화개장터에서 주름 파인 정겨운 얼굴들을 만날 것이다.
한국의 봄은 그렇게 수줍은 듯 지나 가고 있다.
dyk47@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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