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아침, 루디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빌 사이먼과 함께 페닌슐라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크를 할 만큼 당시 줄리아니의 인기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9시가 채 못 되었을 때 줄리아니의 셀폰이 울렸다.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다는 9.11 테러발생 보고였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을 때 대통령 부시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고 부통령 체니는 지하벙커로 피신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인들 앞에 흔들림 없이 우뚝 선 리더가 줄리아니였다. 전국에 생중계된 TV를 통해 비쳐진 그는 강인한 리더였다. 침착하게 체계적으로 수습에 나섰다. 정직했다. 피해가 예상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터프하면서도 따뜻했다. 희생자의 가족을 위로하고 모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정을 쪼갰다. 하얗게 재를 뒤집어 쓴채 위험한 현장을 누비는 시장의 모습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훌륭한 견인차였다. 그날 밤 줄리아니는 사건현장에 서서 다짐했다. “뉴욕은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우린 희생자들을 위해 슬퍼할 겁니다. 그러나 뉴욕은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영웅 탄생이었다. 극한적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한 그의 리더십은 영웅에 목말라하는 미국인들을 감동·열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임기 말년의 지겨운 시장에서 하루만에 ‘미국의 시장’ ‘지구촌 테러전쟁의 사령관’으로 떠오른 것이다. 전 미국이 ‘루디, 루디’를 환호했다. 영국여왕은 기사작위를 수여했고 프랑스대통령은 ‘반석같은 루디’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타임지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2년전 LA시장 선거 때 “왜 우리에겐 루디같은 지도자가 없느냐?”는 불평이 나왔을 정도다.
2008년 대선 공화당 후보지명전에 나선 줄리아니가 선두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번주 뉴스위크 여론조사에 의하면 그동안 공화당 후보 1순위였던 매케인을 59% 대 34%로 크게 앞서고 있을 뿐 아니라 민주당의 인기후보들인 힐러리와 오바마 보다도 지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5년반이나 지났지만 9.11 영웅의 신화는 아직 빛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뉴욕이 보는 줄리아니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특히 뉴욕의 언론들이 평가하는 ‘진짜 루디’는 상당히 다르다. 이번 주 특집을 쓴 뉴스위크도, 뉴욕타임스도, 뉴욕매거진도 ‘줄리아니 대통령’에 대해선 부정적 시각이 강하다. 하긴 언론의 속성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 다른 후보들도 출신지역 미디어들의 악평을 감수해야 했다. 아칸소 신문은 클린턴을 ‘교활한 윌리’로 불렀고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기자는 매케인을 자질부족으로 깎아내린 후 유세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미국 미디어의 본거지인 뉴욕에서 8년 시장을 역임한 줄리아니는 사실 낱낱이 해부당한 상태다. 그는 유능한 시장이었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범죄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뉴욕을 재임 중 안전하고 풍요로운 활기 찬 도시로 부활시켰다. 그런데도 뉴욕 기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줄리아니는 독선적이며 극단적이고 이견이나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재자’의 모습이다. 사생활도 복잡하다.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했던 그의 아버지는 무장강도 전과자였다. 루디 자신은 2번 이혼하고 3번 결혼했다. 조용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해외토픽에 오를 만큼 시끄럽게 전개된 스캔들이었다. 뇌물수수로 기소 당했던 경찰국장과의 밀접한 관계도 구설수에 올랐다. 악재들이 이미 다 알려져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공화당 지명전 후보로서의 줄리아니의 취약점은 사회이슈에 대한 그의 진보적 성향이다. 세금이나 사회복지, 국가안보 등에는 보수적이지만 공화당 보수진영이 절대 반대하는 낙태, 동성애자 권리, 총기규제에 대해 모두 지지를 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지금 줄리아니를 홀대할 처지가 못 된다. 폭락한 부시의 인기와 함께 무너지고 있는 공화당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승리할 수 있는 후보’다. 익명의 공화당 지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에게 가장 큰 악몽이 무엇인 줄 압니까? 힐러리 대통령입니다” 그 힐러리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바로 줄리아니라고 여론조사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선거는 감성적으로 치우치고 있다. 내용보다는 이미지가 승패를 좌우한다. 첫 여성, 첫 흑인의 이미지 못지않게 어필하는 영웅의 이미지가 가세했다. 공화, 민주, 무소속 모든 유권자에게 호감도 골고루 높은 줄리아니가 어느새 관심권 중심에 들어와 있다.
대선까지는 아직 20개월이나 남았는데 선거전은 벌써부터 눈을 떼기 힘들게 흥미진진하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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