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형란 (수필가)
언제였던가, ‘살과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몸과 마음 모두 가벼워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보고 싶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나와의 약속을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었던 소망이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노력끝에 조금은 이루어진 듯 하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읇고,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데…
지난 삼년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주일 미사 안 빠지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던 덕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오밤중에 깨어나서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부르르 떨지는 않으니 말이다.
오래전에 읽은 밀란 쿤테라의 유명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두브체크 정권이 소련의 침공으로 무너지게 된 1960년대 말, 당시 체코 젊은이들의 치열한 삶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무게와 성에 대한 탐닉과 욕구를 그려낸 문학작품이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이것을 원작으로 만든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도 보았는데, 번역서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문장에 담겨진 인간 존재와 사랑에 대한 작가의 고유한 철학을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영화보다는 책이 나에게 훨씬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정치적 억압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아내인 테레사를 사랑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사비나와 육체적 탐닉으로 맞대응하는 토마스와 생과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테레사,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구속하지 않는 사비나가 그들이었는데, 내가 공감했던 인물은 테레사였다.
작가가 이들의 다른 삶과 사랑의 방식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 주워진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로,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알기에는 아직 어렸던 이십대 초반에 나름대로 이해했지만 지금 읽어보면 달리 생각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진정한 무거움도 가벼움도 없다라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 따라 모두 다르게 해석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존재의 가벼움은 실수도 연습도 반복도 허용되지 않고 단 한번으로 사라지는 그림자 같은 삶, 아무리 무거워도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생명의 유한성, 즉 허무함을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결국 소멸되는 가벼운 존재일지라도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은 감당해야하는 삶의 무거움, 뜨거운 무더위와 살을 에이는 추위, 일상의 고단함과 근심, 질병과 고독, 사랑과 미움, 행복과 불행, 웃음과 눈물로 질척거리는 생의 한가운데 내던져져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건 선택이건 저마다 다른 모양과 무게의 고통을 짊어지고, 이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여러 문학작품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나의 눈에 보여지는 삶은 누구에게나 고단하고 때때로 눈물나게 아프고
가슴 시리게 외롭지만, 그늘로 인해 빛이 더 눈부신 것 처럼, 또 그렇기에 삶은 더 기쁘고 아름답고 살아 갈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짓누르는 생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해 속절없이 목을 매다는 이 세상에, 들판의 들풀처럼 이름없는 인생들은 말해서 무엇할까…길바닦에 쭈그리고 앉아 푸성귀를 팔며 생의 고단함을 한눈에 보여 주면서도 웃는 시장 아줌마들의 주름진 얼굴이나, 불행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낙천적인 웃음에서는 생의 모든 고통과 슬픔들을 훌쩍 뛰어넘은 자유로움이, 허무함이 아닌 진정한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행스럽게도 나는 더 자주 웃게 되고, 남들이 뭐라해도, 빨리 가라고 누가 고사를 지내도 내 명대로 사는 날까지 즐겁게 살기로 작정한 요즘,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온 시 한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내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이 시구를 떠올릴 때마다, 삶이 나의 숨통을 아무리 억세게 조여와도 질기게 버티자고, 일상을 사랑해도 붙들고 매달리지는 말자고…나 혼자 새끼손가락 올리고 스스로에게 약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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