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고흐·고갱 ‘추상’으로 미술의 새 지평
#구상에서 추상으로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구상과 추상의 차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구상이요,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추상이다. 구상의 시대였던 18세기까지는 모방과 정확성이 가장 중요한 잣대였으나 인상파의 등장 이후, 마네가 구상에서 추상적 표현을 이끌어낸 후 미술계에는 새로운 잣대와 기준이 생겼다. 그 새로운 기준을 처음 만들어간 사람들이 폴 세잔과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세 사람으로 이들이 현대 미술계에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피카소가 없었다면 현대미술사에 관한 책들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폴 세잔(1839∼1906)이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을 것이라고 미술사가들은 말한다. 세잔을 모던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만큼 그가 혁명적인 시도를 보여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던아트, 즉 현대적이라고 하는 사조에 대하여 알아둘 것은 미술사에서 모더니즘은 큐비즘이 등장한 1906년부터 1960년대까지를 말한다. 60년대 이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고, 현재 당대의 미술을 말할 때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아트라고 한다.)
세잔은 인상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유롭고 짧은 붓놀림, 빛과 색깔, 순간의 포착을 강조하다보니 그림은 현란했지만 형태와 구성이 튼튼하지 못하며 깊이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또한 보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인상에 치중하느라 즉흥적이고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인상파의 이러한 약점을 해결하고 항구적인 가치를 가진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자연물의 겉모양보다는 본질을 끄집어내 영구성이 깃든 그림을 그리려 하였다. 그 결과 모든 물체를 원통과 원추, 구의 세 가지 기하학적 틀로 환원시켰으며 이같은 형태의 단순화 시도가 피카소, 브라크 등 20세기 큐비즘의 탄생을 불러온 것이다.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세잔과 후기인상주의를 실현한 사람들이다. 잘 알려진 대로 두사람 모두 지독하게 고생했고 배고팠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렸다.
고흐는 27세부터 37세까지 꼭 10년 동안 화가로 작업했는데 그 10년간 무려 유화 800점, 드로잉 800점을 그렸다. 죽기 전의 마지막 70일 동안은 매일 한점씩 그렸는데 그 70점의 작품이 모두 역작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던 동안 팔린 작품은 단 한점, ‘레드 와이너리’란 그림이었으며 지금 돈으로 50달러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말년에 굶주리고 우울증과 신경쇠약과 발작으로 고통받던 그는 아를르에서 잠시 고갱과 함께 지내던 중 싸움이 나서 한쪽 귀를 베어버렸을 정도로 광기를 보였으며 이듬해 권총자살했다. 그런데 고흐의 귀를 절단한 사건에 대하여 한 독일학자는 고갱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여 관심을 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모든 정보는 고흐가 아니라 고갱이 전한 이야기를 따른 것이며 경찰 리포트에도 누가 베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후에 고갱 자신이 자기가 잘랐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그 학자의 주장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내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색깔을 자유롭게 씀으로써 내 자신을 좀더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 핵심이다. 모방에서 표현으로 넘어가는 순간,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사물을 왜곡하고 일그러뜨림으로써 속마음을 표현하려 했던 고흐는 광란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에 고스란히 표현했다.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
폴 고갱은 괴팍한 사람인데다 이기적이고 오만했으며 거짓말도 잘 했다고 한다. 원래 스탁브로커로 돈을 잘 벌었으나 35세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인간문명 특히 도시문명에 대한 증오가 극심했다. 고흐와 헤어진 후 그는 인습적이고 인공적인 세계를 떠나겠다며 타히티로 가서 그곳서 살았다. 그는 자연이 곧 진리이며 타히티가 원초적 자연의 이상적 환경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사가들에 따르면 당시 타히티는 이미 서구문명이 들어가 상당히 부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시적 색감, 평면적 패턴, 단순화된 형태, 상징적 표현을 사용했던 고갱은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함으로써 뭉크와 나비파 등 후대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가 딸이 죽고 나서 그린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는 불멸의 역작으로, 그 자신뿐 아니라 보는 사람 모두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고흐와 고갱은 화가이기에 앞서 철학자였으며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삶의 궁극적 의문을 해결하려 애썼다고 미술사가들은 분석한다.
고흐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자신도 목회를 하려다 실패한 후 화가가 된 사람이고, 고갱 역시 신학교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난봉꾼 같아도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해 평생 씨름한 흔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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