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어도 못할 때는 안할 자유를 누리고
하기 싫어도 해야 된다면 할 자유를 누리면
화요일(12일) 저녁 6시. 요일도 시간도 애매했다. 좀 이르면 학생들 모이기 좋고 더 늦으면 일반인들 모이기 좋을텐데, 그런 아쉬움들이 기웃기웃 앞장을 섰다.
그러나 기우였다. UC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6층 컨퍼런스 룸. 이런 저런 세미나 때 쉰 개 남짓한 좌석의 절반가량은 노상 비어 있던 그곳이 모처럼 꽉 찼다. 몇몇은 문 밖 로비에 보조의자를 놓고 앉아야 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결정돼 닷새 전에야 반짝홍보를 하는 등 급조된 행사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약 예순 명의 참가는 더욱 이례적이었다.
그곳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했다. 참가자들이 소리 맞춰 부르는 삼귀의와 마음 맞춰 외우는 반야심경이 늘 학술적 문답에 이골이 난 그 강의실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가꾸는 정토회를 이끌면서 일과 수행의 완전한 합일을 몸소 증거하며 한국불교와 세계평화에 새 희망을 불어넣어온 법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애(자녀)가 ‘낼 모레 영화보러 갈래요’ 그러는데 엄마가 ‘안돼. 시험이야’ 이러고, 애는 또 ‘전 영화 볼 자유가 있단 말이에요’ 이럴 때가 있고, 선생님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갑니다’ 이러는데 한 학생이 ‘저는 안갈래요. 영화 안볼 자유가 있어요’ 이럴 때가 있고…도대체 어떤 게 자유인가, 보는 게 자유인가, 안보는 게 자유인가. 보고싶을 때는 보는 게 자유고 안보고 싶을 때는 안보는 게 자유다, 한마디로 하면 뭐냐, 지(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자유다, 맞아요?
대부분의 인간들이 철석같이 믿고 추구하는 자유가 실은 갈등과 괴로움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의 자유를 속박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을 일그러뜨리는 근원이 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비교예시였다.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니까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시끄럽다, 왜 자유를 원하느냐, 행복하기 위해서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괴롭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괴로워졌다, 이거 모순 아니냐 이거여…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자유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이런 자유를 위해서 희생이 따르고 남을 속박하고 이런 자유 말고-굳이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자유다-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희생이 없는 자유가 없을까, 이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덧붙인 스님의 법문은 곧장 핵심으로 파고들었다. 보고싶을 때 보는 게 자유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다, 이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해야된다는 것에, 그 감정에, 그 생각에, 그 마음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여, 자신이 거기에 속박받고 있다는 거여, 그 욕망 속박, 거기서 지금 벗어날 생각을 안하고 욕구에 갇혀 산다 이거여. 그런데 여기에 ‘하고 싶더라도 안해도 된다, 하기 싫어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잠시 뜸을 들인 스님은 이것이 바로 걸림없는 자유, 참자유라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참자유는 UC버클리 한국학센터(소장 클레어 유)와 본보가 후원한 이날 특별법회의 주제이기도 했다. 미국적 사고방식으로는 이걸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토를 달면서 스님은 엄마가 가라 하면 갈 자유를 누리고 가지 말라 하면 안갈 자유를 누리면 누가 그 어린 아이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겠느냐며 하고 싶을 때 해야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해야 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말 것을 거듭 강조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예화와 함께 걸핏하면 하느님탓 전생탓 팔자탓 운운하는 요즘 사람들의 풍조를 차례로 지적한 스님은 좋아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이 모두가 다 자기 마음이 짓는 거요, 이거 알게 되면
괴로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며 내 마음대로 하려는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또다시 주문했다.
둘이 있으면 귀찮다고 괴로워하고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괴로워하고, 가지 말라고 말려도 미국에 왔으면서 미국에 와서는 이것 때문에 괴롭다 저것 때문에 괴롭다 하고, 인도 가면 인도 불평하고…레익타호를 보고 야 멋지다 기분 좋다 이러면 내가 기분 좋은 거요, 레익타호가 기분 좋은 거요? 금문교를 보고 누구는 야 좋다 하고 또 누구는거 뭐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거 아이구마(아니구만) 이러면 금문교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고 이러는 겁니까?
그렇다고 세상일에 무심해지는 게 참자유일까. 그런 오해와 함정을 스님은 경계했다. 아울러 사회적 실천의 참된 자세를 제시했다. 나는 자유로운데 (그치지 말고) 남도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는 거여. 다만 사회적 실천을 하더라도 분노로써 파괴적인 힘으로써 하지 말고 자비심으로,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는 거여.…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여지도록 하는 거여, 이게 보살의 원리다, 여기에는 희생이랄 것이 없어, 그것은
종교하고도 학벌하고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병이 들었어도 할 수 있고 가난해도 할 수 있는 거여.
말은 그럴싸해도 실천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핸드폰 처음 나왔을 때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몇가지만 알면 금방 다룰 수 있듯이 자유로워지는 원리 또한 같다고 설명한 스님은 참자유에 이르는 길의 최대방해 겸 유일훼방꾼 ‘욕망’으로 말꼬리를 되돌렸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은 쾌락주의요,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고행주의에요. 둘 다 놔버려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따라가든지 참든지 그 둘을 떠난 제3의 길, 그게 중도에요. 그러면 수행자는 욕망이 털끝만큼도 안일어나느냐, 그건 아니여. 일어날 때가 있어. 다만 그것을 응시하는 것,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요.
예를 들어서, 꿈에 강도한테 쫓기는데 도망치다가 누가 숨겨줘서 강도를 피한 거 하고 눈을 탁 떠서 꿈이구나 하고 알아버리는 거 하고는 천지차이여. 누가 숨겨줘서 피한 경우에는 여전히 강도도 있고 구원자(숨겨준 사람)도 있지만 눈을 떠서 꿈이구나 하고 알아버린 경우에는 강도도 없고 구원자도 없는 거요, 이게 바로… 참자유, 즉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법륜 스님의 UC버클리 법문은 간간이 웃음과 쉴새없는 끄덕임 속에 2시간 이상 계속됐다. 30분가량 즉문즉설까지 보태 밤 9시쯤에야 법석은 겨우 접혀졌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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