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이야기
매 4주마다 한 번 쓰는 원고지만 마땅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머리에 쥐가 나며 비범하지 못한 나의 글 재주에 한숨이 나오는데, 이럴때면 학창시절 나의 주위에 있던 재능있고 정말 글 잘 쓰던 친구들이 떠오르고는 한다. 청춘의 고뇌와 버거움으로 그 시절의 아름다움도 모른 채 아득한 추억 속으로 흘러가 버렸지만, 그때 나와 같이 잔디밭에서 수다도 떨고 비 내리는 밤이면 술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있을까 가끔씩 궁금해진다.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친구는 문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던 친구였는데, 학창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한 때 지냈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책을 늘 한 손에 들고 생각이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걷던 그녀의 작문 노트를 언제인가 우연히 읽게 된 적이 있었는데,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철학적인 고뇌와 관념적인 사고로 그득했던 수려한 그녀의 문장에 나는 무척 놀랐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때부터 합창부였던 나보다 더 맑고 고음으로 올라가며 가곡을 부르던 그녀의 미성에 다시 한 번 놀랐었고,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한 적 없이 교내 미술반에서 그렸다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나는 기절할 뻔 했었다.
그녀를 곁에서 바라보는 나는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심정이었는데, 어쨌거나 살리에르가 모짜르트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것으로 늘 마음의 작은 위안을 삼고는 했었다. 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것에 심한 갈등을 하다가 국문학으로 전과를 했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또 정신적인 고뇌와 방황으로 작은 정신분열증세도 있어서 휴학을 몇 번 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그녀를 보면서 내가 느낀것은 천재는 타고난다는 것이며, 나에게는 그런 천재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상처로 인해 이름 모를 마음의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리던 친구, 지금은 종교의 길을 걷는 시를 쓰던 친구, 수필가인 어머니의 글 재주를 물려받았지만 글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건지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그 길로 가지않겠다는 결심하에 장사를 하는 친구, 그리고 학점 짜기로 유명했던 장 영희 교수님한테 유일하게 A를 받아 부러움을 샀던 친구는 몇년 전 직장 연수차 산호세에 몇 달 와 있을 때, 결혼 안할거냐는 물음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남자가 아니라 밥 차려 줄 아내라며 남편하고 살기싫으면 자기랑 살자고 해서, 그녀 덕분에 나는 남편에게 당신 말고도 나랑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줄 섰다고 큰소리칠 수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평범했기에 어떤 형식으로라도 내가 글을 쓰면서 이렇게 주기적으로 얼굴을 들이밀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서점에서 나의 수필집을 사서 읽었다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글을 읽고 반가움에 눈물이 막 났었다면서 그렇게 오래 방황하더니 이제는 마음을 잡았냐고 나에게 물었을때, 글이라도 안 썼다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할 만큼 나는 집에 갇힌 것을 힘겨워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된 것은 인생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간절히 원했던 삶과 꿈꾸었던 나의 모습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부터 나를 오래도록 붙잡고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물음의 답을 어렴풋이나마 알게되어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박 정애씨의 ‘님은 먼 곳에’라는 중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사랑이 고파서 죽는다고….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자기 자신을,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내 생각도 가끔씩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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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창/
안혜승 (지휘자)
무지개를 본 날
비가 왔던 지난 금요일 오후, 무지개를 봤다. 프리즘을 통하여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자연적으로 하늘에 생기는 무지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태양의 고도가 낮고, 한 쪽에서는 비가 오고, 다른 한 쪽에서는 햇볕이 드는 이 세가지 조건이 만족될 때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무지개이다. 생각해보면 까다로운 조건인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볼 수 있는 광경이어서 더 흥분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이 외쳤다. 놀랍게도 그 선명한 스펙트럼 위로 조금은 덜 선명했지만 확실한 색감의, 또 하나의 무지개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처음 봤던 무지개로 끝났을 감동이 두 배가 되어 다가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쌍무지개였다.
사람마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 현상등이 주는 의미는 다르다. 무지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이 주는 과학적인 현상 자체 그 이상이 아닐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전의 기억들과 연관된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순간이 될 지 모른다. 보는 사람의 성격이나 직업이 그러한 의미들을 부여하는 데 작용을 할 수도 있고,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그 때의 처한 상황으로 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무지개가 뜬 그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야만 그 의미가 생겨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다시금 깨달아지는 사실에 나는 주목하게 되었다. 육체적인 눈 뿐만 아니라 이를 넓고 깊게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깨닫는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개의 무지개만 보았던 내게 이 사실은 내가 과연 내 앞의 사물들을, 상황들을, 그리고 사람들을 마음의 눈으로 넓고 깊게 보고있는지에 대해 확실한 경각심을 일으켜 주었다.
마음의 눈이란 열린 마음,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단 말이겠지. 눈 앞의 것만을 보고 그 뒤에 있는, 어쩌면 더 중요한 의미가 될 지 모르는 그 어떤 실체를 놓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의 부족함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 있어 무지개는 ‘약속’의 의미이다.
그렇기에 강한 신뢰와 의지로 다가온다.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가지 원색을 비롯하여 하나하나가 다 눈에 띄게 강한 일곱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띠, 어떻게 보면 자연의 색과는 동떨어진 듯한 화려한 일곱 색깔의 띠는 멀리 보이는 산과 건물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한 두 개의 무지개가 뜬 하늘이 참으로 풍성하고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마음에 깊이 남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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