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사에 공식 기록된 첫 여성후보는 벨바 록우드다. 법대를 졸업한 그에게 변호사 개업 금지판결을 내린 판사는 꾸짖듯 말했다. “법정엔 여자가 필요하지 않다.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다. 가서 남편의 시중을 들고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가구의 먼지를 터는 것이 마땅하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앞장섰던 록우드는 1884년 평등권당(Equal Right Party)의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기자가 물었다.
“여성도 당선될 수 있다고 기대합니까?”
“이번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될 것입니다”
지난 주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2008년 대선 출마 선언으로‘언젠가는…’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미 여성의 정계진출은 모순되게도 투표보다 출마가 먼저였다. 여성의 투표가 허용된 것은 1920년이었으나 첫 대통령후보는 이미 1872년에 등장했다. 민권향상 뿐 아니라 자유연애, 짧은 치마, 세계정부 등 과격한 정책을 들고나온 평등권당의 빅토리아 우드헐이었다. 그러나 이 33세의 젊은 기수는 35세 이상이라는 연령제한에 걸려 후보로 정식 등록은 하지 못했다.
연방의회와 주지사 진출은 남편의 사망이후 미망인들의 직위 승계가 대부분이었다.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은 죽은 남편의 임기를 잠시 채운 87세의 레베카 펠턴이었고 주지사 역시 남편의 사망후 자리를 이어받은 와이오밍주의 넬리 로스가 첫 번째였다. 예외는 연방하원이었다. 1917년 몬태나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지넷 랜킨, 전체 의원 중 혼자서만 세계1차대전 참전을 반대해 논란을 빚었던 그는 남편 후광 아닌 자신의 힘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뭄에 콩나듯이 최초의 여성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한편으론 여성의 투표권을 위한 투쟁이 미 전국 곳곳에서 펼쳐졌다. 1920년 드디어 미 여성참정사 대단원의 막이 오른다. 여성들의 투표를 허용한 수정헌법 제19조 통과 후 감격적인 첫 투표가 실시되었다. 여성의 정치참여 시도가 활발해진 것은 그 후로도 반세기가 지난 197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였다.
이젠 여성들에게도 정치환경이 상당히 쾌적해졌다. 죽은 남편의 자리를 이어받는 정계진출이 그친 것은 이미 오래고 낙태권 등 특정 이슈만을 주장할 필요도 없어졌다. ‘최초’라는 타이틀에서 해방되면서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상징에 머물렀던 과거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전문 정치가로 안정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여성은 전체 인구의 52%다. 유권자의 54%이고 실제 투표 참여자의 56%다. 지난 대선 때도 여성 유권자가 남성보다 9백만명이나 많았다. 그런데도 여성들의 정계진출은 저 아래 소수에 머물러있다. 435명 연방하원 중 71명, 100백명 상원의원 중 16명, 50명 주지사 중 9명 - 그나마 ‘여풍당당’등 요란한 미디어의 각광을 받은 지난해 중간선거의 ‘거센 여성바람’의 결과로 얻어진 숫자다.
앞서 지난 10여년 선거 때마다 불었던 여성열풍은 선거전 초반을 휩쓸다가 번번이 막바지에 맥없이 스러졌다. 여성후보들의 자질부족일 수도 있고 기성정계의 장벽이 견고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여성리더에 대한 편견이었을 것이다. 공화당 여론분석가가 ‘사람은 인습의 동물인데 군 총수권자인 대통령에 여자를 뽑겠느냐’며 느긋해 하는 것도 이같은 깊은 편견에 기대기 때문이다.
그 성향은 확실히 바뀌고 있다. ‘여성이 여성을 더 안 뽑는다’는 기대 혹은 우려는 낡은 생각이다. 현재 힐러리를 지지하는 가장 확실한 보팅블럭도 여성들이다. 전 여성유권자의 59%가 지지한다. 똑똑하고 유능한 그를 롤모델로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도 환호하지만 중년이상 기혼여성들의 지지도 부쩍 늘어 60%에 가까워졌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성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밀리며 일하다보니 여성의 입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동성정치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리더에 대한 기대도 바뀌고 있다. 1년전 칠레와 라이베리아에서 각각 첫 여성대통령을 선출했을 때 미국의 미디어들은 ‘상처받은 국민들이 어머니같은 대통령을 원했다’고 분석했었다. 그들은 둘 다 강력하기보다는 중도적이고 실용적인 화합을 추구하는 리더들이었다. 여성지도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꼭 마가렛 대처나 골다 메이어처럼 ‘남성보다 더 강한’ 여성이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다.
미국에서의 남녀평등은 아직도 현실이 아니라 목표에 속한다. 지금까지도 먼 길을 돌아왔지만 가야할 길은 앞으로도 한참이다. 모든 여성이 모든 직장에서 당연하게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때까지는 ‘평등’이라는 꿈은 실현된 것이 아니다. 첫 여성대통령의 탄생은 이 꿈의 실현을 향해 한 단계 도약하는 멋진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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