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대 미 대통령 제럴드 포드의 임기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닉슨 사면’이었다.
‘1974년 9월8일 일요일, 포드 대통령은 혼자 교회에 가 예배에 참석했다. 백악관에 돌아온 것이 오전 11시5분, 그는 곧 TV 카메라 앞에 앉아 미 국민들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전임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관련 모든 범죄행위에 대해 사면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 스캔들에 대한 전국적인 집착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어서 누군가가 끝을 내야한다면서 그는 “나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자신의 책 ‘그림자’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며 사면 결정의 가장 핵심 요인은 닉슨과 워터게이트를 과거로 묻어버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사면은 참모들과도 의논하지 않은 ‘외로운 결정’이었다. 포드가 재임 중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상처의 치유였다. 당시 미국은 오랫동안 끌어 온 베트남전에 더해 워터게이트가 터진 후 불신과 분노로 국론이 분열되면서 깊은 상처에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포드는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온 나라가 함께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지난 일을 빨리 덮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소 언변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이날의 성명은 웅변적이었다. “내 양심은 이미 덮혀진 장을 다시 여는 악몽을 연장해서는 안된다고 확실하게 내게 일러줍니다. 내 양심은 대통령인 나만이 이 책(워터게이트 사건)을 덮고 봉해버릴 헌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고 일러줍니다. 내 양심은 또 국가의 평온을 선언하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를 유지시켜나가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나는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며 여론에 밀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여론은 그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전국의 미디어는 일제히 혹독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고 71%였던 그의 지지도는 성명발표 한 주 만에 49%로 곤두박질쳤다. 25년 친구였던 백악관 대변인마저 양심의 문제라며 사표를 내던졌다. 그가 호소한 의도와는 달리 그에게 쏟아진 것은 강한 의혹이었다 - 포드가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받기 위해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아닌가. 취임 한 달 만에 발표한 성명이니 의혹도 무리는 아니었다.
의회가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뜻을 비쳤을 때 포드는 하원 소위에 자진 출두해 당당히 증언했다 : “결단코 어떤 거래도 없었다” 증언 후 닷새 만에 의회는 조사를 포기했다. 포드는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결정이 최선이었음을 강변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2년, 3년, 아니 4년 후까지도 기소와 재판, 항소…그리고 그에 따른 분열과 갈등으로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적고 있다.
결국 포드는 다음 선거에서 값비싼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 76년 대선에서 무명의 땅콩농장주 출신 지미 카터에게 패배한 것이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 닉슨 사면이었다. 승패는 2%차이로 갈렸는데 공화당 유권자의 7%가 기권하거나 카터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포드는 accidental president로 불리운다. 글자 그대로 ‘사고에 의해 뜻하지 않게, 우연히 된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부통령도 스피로 애그뉴가 부패혐의로 사임하는 바람에 우연히 되었고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닉슨이 하야하면서 뜻하지 않게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중서부 소도시 출신인 포드는 실제로 대통령의 야망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취임한 그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해 갔다. 대통령직은 ‘승리해 얻는 상이 아니라 충실히 이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강조하며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정직하고 근면한 그는 이중적인 닉슨과는 달리 소탈한 성격으로 미디어에게도 신임을 얻었고 아래 사람들도 늘 속 깊게 배려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포드행정부 동창회’는 그의 은퇴후 캘리포니아까지 따라가며 정기적으로 만남을 계속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사면결정에 대한 평가도 차츰 달라지고 있다. 2002년 여론조사에선 60%가 당시의 그의 결정이 옳았다며 지지를 표했다. 2001년엔 존 F.케네디재단이 그에게 ‘용기 있는 인물’ 상을 수여했다. 물론 아직도 사면 결정이 ‘중대한 실수’였다는 비판론은 강경하다.
용기였는지, 실수였는지에 대한 최종 평가는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역사가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 당시 못지않게 이라크전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2006년의 저물녁에 전해진 그의 부음은 상처와 치유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희생당하며 국가의 상처 치유를 시도했던 2년이란 짧은 기간의 ‘우연한 대통령’, 그러나 그 후 3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국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그의 명복을 빈다.
<박 록> 주 필
rok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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