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주부)
자동차들이 미친듯이 경적을 울려댔다. 운전사는 오늘 축구 경기가 있었노라고 말해 주었다. 유명한 팀이냐고 묻자, 동네별로 축구 시합을 하는 날인데, 이름을 일일이 말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Duomo 광장에 도착할 즈음, 차들이 밀려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차창 밖을 보던 나는 툭툭 떨어지는 미터기를 보고 택시에서 내렸다. 어차피 차가 기어가는 시간에 걸어가면서 성당과 광장을 보고 싶었다.
성당은 조각과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성당 외벽에 묻힌 말랑말랑해 보이는 하얀 살이 추워 보여서 손바닥을 대어 보니 따듯했다. 아무리 가까이 얼굴을 대고 들여다봐도 돌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서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다들 바쁜지 내가 보건 말건 아무도 신경도 써 주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택시를 타려고 광장을 걸어 나오다가 차가 막히는 이유를 보았다. 한쪽 다리를 저는 깡마른 남자가 도로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갈색 머리는 여러 날 감지도 않고 빗지도 않은 것처럼 엉켜 있었고, 입고 있는 낡은 셔츠와 바지는 색을 알 수 없이 우중충했다. 도로를 가득 채워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양방향으로 차가 한 대씩 지나는 도로였다. 거의 완성된 여인의 얼굴은 따듯했다. 그 자리를 뜨고 나서야 이목구비가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해냈을 만큼 온통 따듯한 느낌이었다. 갈색 머리에 맑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갸름하지만 이마가 반듯하고 뺨의 윤곽은 오동통한 느낌이 들 만큼 둥글었다. 장신구 하나 없이 맑은 올리브색 피부가 깨끗하고 꼭 다문 입술은 조금 얇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이탈리아 여인이었다. 차들은 그림과 청년을 피해 광장 안쪽으로, 인도로 덜컹거리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경적 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나지 않았다. 그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이보다 택시 운전사들이 내게는 더 놀라웠다.
성당과 광장의 그림이 있는 엽서가 문 밖에 진열된 모퉁이의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청소를 안 하는지 공기 중에 먼지가 많이 섞여 있었다. 어두컴컴한 가게는 물건을 되는대로 쌓아놓은 듯한 인상이었고,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는 넓어 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어서 눈내린 성당과 광장의 엽서들만 사려고 돈을 건넸다. 주인이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동안, 눈을 둘 곳이 없어 올려다 본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바람에 펄럭이는 옷을 입은 여인들이 아름다운 팔을 드러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주는 거스름돈을 받아들면서 어둡고 탁한 가게를 돌아보았다. 나오면서 먼지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한번 더 보았다.
택시를 타기가 싫었다. 몇 걸음 걷다가 저녁 손님을 받는 카페가 문을 열기에 길 위의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 한 잔을 달라고 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묻기에, 그냥 제일 비싼 맥주 한 잔을 달라고 했다. 목이 길고 손잡이가 있는 두꺼운 유리잔에 담긴 맥주는 부드럽고 진한 거품을 이고 있었다. 맑은 호박색의 맥주는 차갑고 아리고 향기롭고 개운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빈 잔을 놓고, 다시 광장으로 걸어갔다. 저 쪽에서는 바이얼린을 연주하고, 다른 쪽에서는 양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림 위에 엎드린 남자를 보았다. 그는 일어서더니 다시 붓을 집었다. 전보다 훨씬 심하게 다리를 절면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하더니 잠시 서 있었다. 나는 다가가 보았다. 남자는 다시 붓을 움직였다. 그는 짙은 색으로 여인의 얼굴을 한 줄 한 줄 지우고 있었다. 붓은 여인의 얼굴선에 닿아 잠시 섰다가 천천히 얼굴을 한 줄씩 덮어나갔다. 그의 고통이 그 길을,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집 센 어린 양같은 사람이었다. 성당의 조각과 그림들이 다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녁 광장을 뒤로 하고 온 정신을 쏟아 그림을 지우는 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얼굴이 반쯤 지워질 무렵 나는 자리를 떴다. 이튿날 아침, 택시를 타고 조금 짙은 색으로 칠해진 도로를 지나면서 발 밑에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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