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가족치유 상담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친구들 혹은 가족과 어울리면서 이따금씩 난 문화차이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예전엔 많은 것을 우리의 문화니까 받아주고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 줬던 것 같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란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 전통도자기도 아니고, 고여있는 물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부분과 상호작용하면서 늘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중요하고 내가 간직하고 싶은 생각과 가치를 우리의 문화가 반영해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개인의 선택과 생활방식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린다면, 우리문화가 내 철학과 가치관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면,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으리라.
얼마전에 한국에 사는 한 선배와 통화를 하다 언짢게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 그 선배의 일과 관련하여 내게 번역을 부탁했는데, 그날 밤에 끝내야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난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고 하여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각별한 사이인지라 문서를 한번 보고 시도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못하게 될 경우, 곧 전화해 주겠다고. 그 “혹시라도”라는 말에 그 선배는 당황해 하는 것 같았고, 섭섭해 하였다. 그리고 곧 그 부탁을 취소했다. 나 역시 당황하였고, 쉽게 이해되지가 않았다. 가능하면 하겠지만, 혹시 못하게 될 경우 바로 연락을 해 주겠다는 나의 대답이 합리적이고 사무적으로 들려 섭섭했던 것일까. 너무도 가까운 사이라서, 특히 선배가 하는 부탁이므로 무엇이든 흔쾌히 당연히 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 섭섭한 마음을 내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을까. 물론 우리문화가 중요시하는 것들 중에는 그야말로 멋있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끈끈한 정이라든지, 다양하고 재밌는 먹거리문화, 가족의 중요성 등. 동시에 이 가치들이 요구하는 것이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해도 보통 그냥 허용되는 듯하다. 부탁이나 질문에 “no” 할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가끔 이모가 내게 하는 말씀이 떠오른다. 남편이 일 마치고 집에 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두라는 것이다. 나도 일하는데, 나도 편히 쉬어야 하는데…그래서 우린 함께 준비한다고 대답하면, 이모는 내 남편을 몹시 가엽게(?) 여기는 눈치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경제적인 조건과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해도, 오랜 세월 우리를, 우리의 부모 세대를 지배했던 남존여비 사상, 남녀역할에 대한 고정된 관념이 아직 잔재해 있는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화가 나거나 불끈하지 않는다. 나의 가치관과 선택을 믿기 때문이며, 우리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천천히 전체 문화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상담일을 해 오다 근래에 와선 주로 가족상담을 하고 있는데, 일을 하면서 문화에 관한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술과 마리화나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생소하여 남의 일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선 어쩌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 청소년 시기는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바뀌기 쉬운데, 이민 가정은 언어장벽과 이중문화로 더 혼란스러울 수 있으며, 서로의 마음과는 달리 관계가 소홀해질 수도 있다.
얼마전에 만난 한 가족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보여졌던 대표적인 예였던 것 같다.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뜻을 따르며, 정직하고 반듯하게 자라길 원하는 엄한 아빠, 남편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되 딸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엄마,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 달라고 갖가지 행동으로 항의하는 고등학생 딸. 간략하게 요약된 이 갈등속에 그들의 답답한 심정과 상처가 엿보인다. 부모와 자녀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가족간의 대화, 관계, 존중, 그리고 서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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