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결국 보라색이었다. 민주당의 블루와 공화당의 레드를 절반씩 섞은 중간색 퍼플. 이틀전 출구조사에서 드러난 미 유권자의 단면이다. 투표장 응답자의 절반이상이 자신을 급진 리버럴도, 극우 보수도 아닌 온건주의라고 말했다. 사안에 따라 낙태·이민등에 대해선 진보적이면서도 세금·범죄등의 이슈에선 보수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7일 중간선거의 결과는 이들이 집권 공화당과 조지 부시대통령에게 내린 징벌적 심판이었다. 실용적 중도성향이 짙은 미국인들이 워싱턴의 당파싸움을 지겨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정치의 만병통치약으로 통해온 ‘초당적 합의’는 부시 취임 후부터 워싱턴에서 점차 사라져왔다. 공화당 핵심표밭인 강경보수를 기반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부시의 지난 6년 정치는 마치 그들만을 의식하는 듯 했다. ‘공화당을 위한 어젠다에 의해 공화당 지도자들이 제안하여 공화당 의회가 통과시킨후 공화당 대통령이 서명한 공화당 법률’로 미국을 다스려왔다고 지난 주말 PBS의 정치대담에서 신랄하게 비판당했을 정도다.
상하양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백악관의 부속기관처럼 움직였다. 충성하는 아군에 둘러싸인 든든한 보호막 속에서 부시는 타협이나 양보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야당인 민주당을 대하는 공화당 대통령의 시선은 무시를 넘어 경멸에 가까웠다. 엊그제까지 부시는 그렇게 ‘우리 편만의 세상’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
밤새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지난 8일 아침 가장 실감했을 사람은 아마 부시대통령일 것이다.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될 수 없는 세상, 무조건 지지해 주던 내편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세상 - 그에겐 낯 선 세상이지만 보통사람들은 날마다 극복해야하는 현실의 세계다.
낯선 정치환경에 던져진 부시에겐 마지막 선택이 주어졌다. 2년동안 레임덕 현상에 빠져 무능하게 허우적대며 정가의 냉대를 감수할 것인가. 그걸 원한다면 강경보수를 고수한채 민주당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면 된다. 아니면 환골탈태하여 인기있는 리더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합의’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행히 부시는 선거 후 첫마디부터 초당적 협력을 다짐했다. 사실 초당적 자세는 부시에게 그리 생소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텍사스 주지사시절 민주당 의회와 효율적으로 일한 경험을 갖고 있다. 여소야대의 정국이 오히려 생산적 분위기일 수 있다는 것은 역사도 증명한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공화당 의회와 맞서야 했던 것은 취임한지 불과 2년만이었다. 클린턴의 선택은 현명했다.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과 때론 타협하고 때론 대결하며 가장 성공적인 사회복지 정책으로 꼽히는 웰페어 개혁안을 성사시켰고 90년대 경제호황의 받침대가 되어준 균형예산도 실현시켰다.
물론 민주당의 화답도 있어야 한다. 부시에 대한 불신이 깊은 민주당 내에선 관계개선에 대한 회의론이 만만치 않다. 6년간 무시당한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백악관을 겨냥한 조사, 소환, 탄핵 등의 단어가 민주당 진영에서 나돈 것도 꽤 되었다. 감정대로라면 보복성 ‘부시 때리기’ 한 마당을 펼치고 싶을 지도 모른다. 또 세금감면 연장과 소셜시큐리티 민영화 개혁등 부시의 최우선 어젠다는 민주당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부시와 민주당은 같은 배를 탄 셈이다. 민주당 의회도 부시 못지않게 갈 길이 멀고 험하다. 2년안에 성숙한 리더십을 가진 정당임을 증명해야 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당쟁에 낭비했다간 2008년 대선 승리는 공화당으로 넘어간다. 이젠 민주당에도 비판만이 아니라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선거전과는 다르다. 당장 이라크에서의 조기 철수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데 민주당의 고민이 있다.
물론 더 많은, 더 적극적 노력은 부시의 몫이어야 한다. 결자해지의 이치다. 초선 캠페인 때 분열 선동자(divider)가 아닌 단결의 기수(uniter)가 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도 미 전국을 이념적 대결장으로 몰고간 장본인이 바로 부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부시는 선거 후 첫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공적 제1호였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경질을 발표했다. ‘초당적 협력의 새 시대’를 향한 용감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급진 리버럴로 소문난 낸시 펠로시 새 하원의장 예정자도 이번 경질을 대통령의 ‘변화’로 환영하며 초당적 자세로 일하자고 화답했다. 좋은 출발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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