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년 한 번도 빠짐없이 미 선거에 참여하면서 갈수록 확실해지는 느낌이 있다. 주민발의안(프로포지션)에 대한 회의다. 처음엔 선거 때마다 10여개씩 오르는 발의안에 대해 내용도 충분히 모른채 찬반 투표를 하자니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차츰 이른바 ‘민의’ 뒤에 숨은 다수의 횡포와 특수집단의 이해득실을 번번히 목격하면서 ‘너무 위험한 제도’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불법체류자를 겨냥했던 94년의 발의안 187도 그랬고 96년의 소수계 보호조치 폐지를 노렸던 발의안 209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발의안은 원래 돈과 권력의 결탁이 심했던 1911년 캘리포니아에서 민의를 여과없이 정치에 반영시킬 수 있는 장치로 채택된 제도였지만 1백년 가까이 지내면서 오용과 남용으로 그 본 모습이 많이 일그러져 버렸다. 사실 태생부터 그리 바람직한 제도라 할 수도 없다. 발의안의 내용은 대부분 공공정책 법안이다. 통과되면 주민 개개인에 따라 상반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당연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부사항까지 면밀히 검토분석하고 폭넓은 히어링을 통해 그 영향에 대한 찬반토론을 충분히 한 후에 최대한 공정하게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공직자를 선출하고 세금으로 봉급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다음 주 실시되는 중간선거에도 13개의 주민발의안이 올라와 있다. 그중 9개의 주제가 ‘돈’이다. 공채발행안도 있고 세금인상안도 있다. 공채든 세금이든 둘 다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결국 그 부담을 떠안게 될 사람은 주민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세금에 치여사는 우리는 무조건 다 반대하고 싶지만 공화당 주지사와 민주당 주의회가 초당적 합의하에 제안한 공채발행안에 대해선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로망 등 기간시설 확충을 위한 재원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4개의 프로포지션은 특수이해집단들이 마련한 세금인상안이다.
그 중 하나가 담배세 인상안, 프로포지션 86이다.
담배세를 올려 흡연인구도 줄이고 그 수입으로 의료서비스를 강화하자는 것이 제안 취지다. 통과되면 내년1월1일부터 시행되면서 담배 한갑이 거의 7달러가 된다. 현행 한갑당 87센트의 세금이 3달러47센트로 인상되기 때문이다. 미 전국에서 가장 높은 담배세다. 첫해 예상되는 세금수입은 약21억달러, 그 돈으로 병원의 응급실 운영, 저소득층 아동에 보험제공, 간호원교육, 금연캠페인과 암·천식·심장· 비만등 질병치료 연구에 쓴다는 것이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발의안 86은 흡연과 의료서비스 문제를 풀기 위한 좋은 해결책도, 정당한 방법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불공평한 ‘죄악세’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미국에서, 특히 반흡연 정서가 강한 캘리포니아에서 흡연자가 죄인처럼 눈총받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다. 숫자도 많이 줄었다. 전체인구의 14% 정도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힘없는 소수그룹에게 전주민이 함께 해야 할 의료서비스 개선의 부담을 떠넘기는 셈이다. 담배세 인상 주민발의안이 처음도 아니다. 88년과 98년에 이어 세 번째다. 게다가 이번엔 인상폭이 무려 300%나 된다. 지나치다. 하루 2갑을 핀다면 1년에 2,526달러의 세금을 내야한다. 재산세 평균액수와 비슷하다.
특수이해집단 간 다툼이라는 냄새도 강하다. 발의안의 대표 제안자중 하나는 병원협회다. 그리고 반대캠페인에 거액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담배회사들이다. 예상 세수 21억달러 중 금연 프로그램엔 10%도 채 안주고 8억달러 가까이가 병원으로 배정된다. 또 발의안엔 병원들에게 일부 독점금지법 적용 면제의 특권도 포함됐다. 담배기업과 병원기업의 이권을 둘러 싼 고래싸움에서 담배 피는 개인들, 새우들의 등만 터질듯 싶다. 배경이 밝혀져서인지, TV광고 효과인지, 지지율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7월 63%에서 9월말 52%로 떨어졌다.
많은 경찰관계자들도 발의안 86을 반대하고 있다. 범죄를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담배값이 오르면 담배를 끊기 보다는 싸게 구입할 방법을 찾는 흡연자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값싼 라스베가스나 세금없는 인디언 보호구역, 혹은 인터넷에서 구입할 수도 있고 이미 형성된 불법판매의 암시장 거래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담배수송 트럭 한 대만 하이재킹하면 2백만달러를 챙길 수도 있지요” 담배를 둘러싼 조직범죄를 걱정하는 한 경찰관의 말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난 흡연가가 아니다. 아들에게 술은 조금 마셔도 담배는 절대 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부모이기도 하다. 주위 사람들에겐 금연을 적극 권하며 술집에서 해변에 이르기까지의 금연법 강화에도 별 이의가 없다. 흡연은 나쁘다. 그러나 불법은 아니다. 그리고 300% 징벌적 증세의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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