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참극 딛고 ‘외로운 웃음’ 되찾은 여고생 김빈나양
지난 4월 LA한인타운에서 50대 가장이 아내는 물론 열여섯 살 난 딸과 일곱 살 난 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자살한 사건은 한인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서른 시간만에 발견된 맏딸 빈나는 목숨만은 건졌다. 그들 가족의 불행한 가족사는 시간이 가면서 세임들 뇌리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 불행 이라는 씻을 수 없는 현실과 망각의 절묘한 찰나 속 빈나양을 만났다. 그 비운의,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김빈나(16)양.
당시 뇌에 탄환을 맞아 중태였던 빈나는 몸의 왼쪽이 마비되는 판단을 받았지만 지금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등교도 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는 상태까지 호전됐다. 병원 측에선 기적이라고 했다. 현재 빈나는 엄마와 가장 막역한 친구이며 친자매 같았던 김미선(46)씨의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난 20일 양지바른 오후, 빈나가 새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한인타운 한 아파트에서 빈나와 빈나의 ‘새’ 엄마를 만나봤다. 간간이 웃음도 새 나왔지만 이들 ‘모녀’ 가슴속에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은 듯싶었다. 기뻐서 울고, 다행이어서 울고, 옛 생각에 울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울고, 불쌍해 울고…. 지난 4월 이후 빈나는 사고 후 빈나는 자그마치 30시간이 넘어서야 911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당시 처음 사고현장을 목격한 이는 현재 빈나 엄마인 미선씨. 이틀째 연락이 되지 않아 몇 차례 문을 두드려 봐도 기척이 없자 락 스미스를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가 그 참혹한 사건현장과 마주친 것이다. 김씨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정신이 들고 나서는 부부가 쓰러져 있는 걸 봤어요. 그리곤 미친 듯이 빈나랑 빈나 동생인 매튜를 찾아 헤맸죠. 그때 부부 침실에서 빈나를 발견했는데 몸이 따듯했습니다. 즉시 911에 신고를 했죠. 출혈이 심했지만 목숨만은 건져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병원에 6주가량 입원했고 퇴원 뒤 정해진 수순처럼 빈나는 엄마가 전도사로 재직했던 교회의 목회자 자택으로 옮겨졌다. 담임목사도 당연히 빈나를 돌봐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보아온 인자하고 좋은 목사님 가족들이 좋긴 했지만 며칠 그곳에 있으면서 빈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오고 한 아파트에서 생활했던 ‘김 집사님’이 가장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작정 김씨네 집으로 왔다. 물론 김씨는 당시만 해도 자신을 보고 싶어 온 빈나를 뿌리칠 수도 없었고,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에 며칠 머물게 했다.“그래도 제가 법적 대리인이 되거나 빈나를 돌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일단 법적 조건인 빈나 방을 제공할 수 없었고, 2베드룸에서 저희 가족도 힘들게 살고 있는 형편이어서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도 빈나를 돌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빈나는 김씨 부부를 엄마, 아빠라 부르며 같이 살고 싶다고 졸랐다. 그런 빈나의 간절한 바램에 김씨 역시 변호사를 통해 사정을 이야기하고 7월초 법원에서 정식 법적 대리인 자격을 얻었다. 그땐 그냥 아무생각 없었어요. 빈나 가족과는 15년을 넘게 알았고, 한 아파트 앞집에서 복닥거리고 산 사이니 친자매 형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죠.
같은 교회에서 사역도 같이 하고…. 특히 둘째인 데보라와는 나이도 같아 둘이서 자매처럼 자랐죠. 그런데 어떻게 빈나의 바램을 마다할 수 있겠어요. 방이 2개밖에 없다는 것도, 먹고살기 빠듯하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법적으로만 어떻게 해결되면 데리고 살아야겠다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가 않았다. 2베드룸 아파트 매니저를 하면서 빠듯하게 생활하는 형편이었는데 빈나를 위해 두 딸이 기거하던 방을 내주고 두 딸은 같은 아파트 앞집으로 이사 보내야 했다. 정부에서 보조가 있다고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한창 자라나는 빈나를 뒷바라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처음 사고 당시엔 빈나의 후원을 철석같이 약속했던 이들도 감감 무소식. 김씨는 빈나를 돌보기 위해 파트타임 일도 그만둬 생활이 막막한 상태다.“빈나와 데보라가 11학년이래서 지금 한창 중요한 때죠. 둘다 필요한 과목을 보충하고 싶어해서 학원에 다니려 하는데 살기만도 벅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데보라도 그렇지만 데려다 잘 키워야 하는데 오히려 서로가 맘고생만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 속이 상합니다.”마음은 앞서지만 경제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빈나 엄마의 마음은 아프기만 하다.
지금 빈나는“끔찍한 사고였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렀어도 당시의 아빠를 이해합니다. 열여섯살 틴에이저가 겪었을 마음고생이며 몸 고생을 뒤로 하더라도 빈나의 말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총격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10대 소녀가 하는 고백치곤 너무 담담하다. “1세 한국 사람들, 특히 나이 많은 아저씨들은 다 그렇잖아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크고, 속마음을 남 앞에서 다 내보이지는 않고. 아마 혼자서 고민하시다 그런 결정을 한게 아닌가 싶어요. 분명 아빠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해는 합니다. 빈나가 끝내 눈물을 쏟은 건 엄마 아빠 이야기가 아닌 남동생 매튜의 이야기 때였다. 아홉 살이란 나이차 때문에 살아생전 잘해주지도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고, 맨날 큰소리만 냈단다.
안경 너머로 한 방울씩, 두 방울씩 흐르던 눈물이 끝내 한줄기 소낙비가 돼버렸다. 쏟아내는 눈물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묻어난다. 잊었다고, 다 털었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가 소리 없는 눈물로 흘러내린다. 하늘나라에 가면 엄마에게도 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꼭 해줄 거란다. 그리고 아빠에겐 “왜 그랬는지, 왜 그때 그런 결정을 했는지”를 묻고 싶단다.다시 말꼬리가 흐려진다. 이젠 담담히 말할 수 있다곤 하지만 빈나는 겨우 열여섯이고 사고난지는 이제 겨우 반년이다. 울지 않으면, 답답해하지 않으면, 화가 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닐테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나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생각하는 건 슬픈 기억보단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워낙 부모님이 바빠서 특별한 가족여행이나 이벤트는 없었지만 어떤 순간들, 단란했던 기억들이 사진처럼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이 그리워지지만 빈나는 현실에 금새 적응했다. 사고 전보다 학교 생활에도 적극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매일 아빠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그래서 좋은 대학가서 성공하라고 귀 따갑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땐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이젠 혼자라고 생각하니 아빠가 하신 말씀이 자꾸 귀에 울립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성공하고 싶어요. 제 자신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해 패션 잡지에서 일하고 싶다는 빈나는 이제 조금씩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법을 서서히 익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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