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복사기 제조로 낯익은 제록스사는 이익의 사회 환원에 적극 동조한 미 대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사원들의 사회봉사 안식년 프로그램을 맨 먼저 실시한 회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록스사가 1971년 신설한 ‘소셜 서비스 리브’는 사원들이 자원봉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주는 3개월부터 1년까지의 장기 유급휴가였다. 시행 5년째를 맞던 1975년, 입사 6년차의 한인 엔지니어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최장기간인 1년의 안식년 허가를 받아낸 그는 제안서에서 이렇게 강조 했다.
“내 경험과 지식·의욕을 모두 동원해 새로 이민 온 한인 청소년과 성인들이 미국사회의 유능한 시민이 되도록 돕고 싶다… 우리 한인 커뮤니티의 문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아는 사람이 다뤄야 하겠지만 서비스 자체는 미사회 전체가 제공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 이민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미국사람이고 우리의 문제는 미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본격적으로 확대된 김기순씨의 커뮤니티 자원봉사 30여년의 단면을 몇 개의 숫자가 보여준다. ‘최소한 4만시간 이상을 바치고, 30만마일 이상을 운전했으며, 20만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건 새 커뮤니티의 기초를 닦은 아버지에게나 요구되는 희생이다’ 원로 언론인 이경원씨가 보낸 찬사다.
그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지난 주말 열렸다. 70세 생일파티를 겸해 1남2녀 자녀들이 마련한 유쾌한 잔치였다. 미국생활 50년째인 그의 파티답게 올드타이머들이 많이 모였다. 타운의 올드타이머들과는 다른 얼굴들이다. 한인사회 젊은 리더 키우기에 소리 없이 힘을 보탰던 조용한 얼굴들이 곳곳에서 반갑게 웃고 있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의례적인 축사도 없었다. 3분으로 엄격하게 다짐받은 너댓 명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는 모처럼 행사장의 ‘축사’를 귀기울여 들었다. 젊은 리더십 개발에 대한 그의 헌신에 감사를 보낸 한 분은 그의 은퇴를 ‘만류’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Still our community needs you. Come back!!!”
20여년 전 취재기자 시절부터 쭉 지켜본 그의 한결같은 꿈은 커뮤니티의 젊은 리더 키우기였다. 리더는 하루아침에 키워지지 않는다. 구체적 플랜을 세웠다. 70년대엔 샌버나디노 산 속에 캠프 코니퍼, 여름캠프를 마련해 흩어져 살던 2세들이 한데 모여 자긍심을 키우며 공동체 의식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 정체성을 확립한 캠퍼들이 성장해 대학생 카운슬러로 봉사를 자청하는 80년대에 들어서며 그는 그 후 10년을 젊은 리더들을 훈련시키는 단계로 잡았다. 한인 대학생 1,000여명이 거쳐간 연례 리더십 컨퍼런스가 신설되었고 곧 이어 미 주류사회에 한인을 대변할 수 있는 젊은 영어세대의 단체로 한미연합회(KAC)가 발족했다.
그가 젊은 리더를 키우며 당부한 것은 크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리더십 관련 서적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일 수도 있다.
- 순수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명예나 이익을 앞세워선 안 된다. 구체적 플랜을 세워야 한다. 플랜을 안 하면 목표가 없고 목표가 없으면 우왕좌왕, 모든 것을 낭비하게 된다. 앞장서서 실천하는 리더라야 한다, 스스로 일하지 않으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자신의 가정과 직장 일을 책임 있게 할 수 있을 때 봉사에 나서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돕겠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라도 혼자서는 못한다. 완벽할 수도 없다. 위대한 것은 팀웍이다…
‘경사(經師)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人師)는 만나기 어렵다’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나오는 말이다. 경서를 강의하는, 다시 말해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은 많아도 삶의 도리를 배울 수 있는 스승은 드물다는 뜻이다. 선생뿐이 아니다. 사회 각계의 리더들 중엔 가까운 주변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을 실천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기순씨는 우리 커뮤니티에선 드문 리더 중 한 분이다. 젊은 리더 키우기에 함께 일한 1세들에게서나, 젊은 리더로 성장한 2세들에게서나 다같이 존경을 받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에 옮긴 리더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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