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가 어렸을 적 꽤액 꽥~ 저공(猪公)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조용하던 산골마을에 메아리치면 다음 둘 중의 한가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수퇘지가 잡념 없이 잘 크도록 거세를 하는 중이거나, 도살을 위해 돼지 멱을 따고 있거나 이다.
명절 때 쓸 돼지고기를 마련할 요량으로 동네 사람들이 한 마리 잡자고 작당을 한다. 누구네 돼지가 적당하다는 둥 언제쯤 잡자는 둥 돼지들이 들으면 끔찍할 모의가 진행되는데,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주인에게 가부를 묻고 흥정을 한다. 돼지 임자는 동네 사람들이 타협해서 결정한 사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밀도살은 불법행위였지만 밀주 제조와 더불어 시골에서는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해오던 전통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사가 끝나면 칼 가는 일만 남는다. 돼지 잡는 일이라면 으레 맡아놓고 하시던 분들이 동네에 두엇 있었다.
사형수들은 형집행일이 되어 간수로부터 아무개 씨 면회요 라는 호출을 받은 후, 체격 좋은 간수들이 양쪽 팔을 끼고 면회실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끌고 가면 살고 싶어 몸부림치며 악을 쓴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돼지는 D 데이가 되어 주인이 우리를 열고 불러내어도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똥 치우고 새 짚을 깔아 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나선형의 짧고 귀여운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 그런데 아뿔사 평소 조그만 회초리를 들고 이리저리 몰고 장난을 치며 함께 놀아주던 주인집 아들 대신 날이 시퍼런 비수를 품은 이웃 아저씨들이 늘어선 것을 보고 돼지는 그만 망연자실한다.
마침내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 돼지는 잘 갈아 예리한 칼에 멱을 찔려 온 동네가 떠나 갈 듯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려주며 죽어간다. 멱따기가 끝나면 예리한 칼이 이번에는 배를 가르는데, 아직 체온이 떨어지지 않은 돼지는 무럭무럭 김이 나는 내장을 벌겋게 드러낸다. 잡은 돼지는 버릴 게 없다. 돼지머리는 제수로, 족발은 주당들에게 안주로, 돼지가죽은 부드럽고 질겨 구두안창으로 사용한다. 시골출신이라면 오줌보를 불어 논두렁 축구 해 본 추억을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 뻐센 털은 구둣솔로, 똥은 질 좋은 거름으로 사용되니 돼지는 참으로 아낌없이 주고 간다. 특히나 내장은 간, 염통, 콩팥, 창자 등 각각 특유의 맛을 내며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돋군다.
돼지내장은 대개 새끼줄로 묶어 쇠죽 끓이던 가마솥에 넣고 푹 삶는데, 양이 제법 많아 도살꾼들의 막걸리 안주가 됨은 물론 잔뜩 군침이 돌아있는 구경꾼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나뉘고 일부는 혼자 사시는 노인들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얻은 내장 토막을 굵은 소금 몇 톨 찍어 한 입 넣고 저작을 해보면 그 쫄깃하고 구수한 맛이라니. 내장이 익어가는 냄새가 동네를 휘저으면 돼지잡이가 끝난 줄로 안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드는데, 고기는 뼈째 저울에 달아 시중보다 헐케 판매가 된다. 고기는 발라 따로 보관하고, 뼈는 추려 무시래기나 시큼한 김치를 넣고 물을 넉넉히 붓고는 뼈국을 끓이는데 먹거리 귀한 그 시절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시골 집돼지들은 사료대신 음식찌꺼기, 고운 쌀겨, 고구마 줄기나 잔 감자, 심지어 소가 먹다 남은 쇠죽 등 온갖 것을 다 먹고 자라기에 사육한 것보다 근육이 단단하며, 비계가 얇고 껍질이 잘근하게 씹히는 맛이 소고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살짝 상한 음식까지 탈없이 잘도 먹어 치워 잡식성 동물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데, 이따금씩 부지런한 주인집 아들이 잡아다 삶아 주는 개구리찜은 별식이었다. 아직 제주도에는 2층에 측간을 두고 바로 아래층에서 별식을 먹고 자라는 돼지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키운 똥돼지가 별미라 해서 봄가을 여행 중인 신혼부부들에게 인기를 끈다 하니 인간의 식탐은 끝가는 데를 모르겠다.
현재에는 우리나라에 토종돼지는 거의 없고, 영국산 검은 돼지 버크셔와 육종교배시킨 종자가 우리나라 흑돼지의 주종이라 한다. 돼지고기는 이슬람권을 제외한 세계 각국에서 즐기는 육류인데 특히 폴란드나 슬로박,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는 쇠고기보다 값이 비싸고 고급식품에는 으례히 쓰일 만큼 선호도가 높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주로 감자를 먹여 키워 그런지 돼지 특유의 노린내도 없이 맛이 좋아 그곳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꼭 맛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말에 바보나 멍청이를 가리켜 돼지라고 부르는데 돼지가 들으면 몹시 서운할 소리다. 돼지는 다만 순진할 뿐 멍청한 동물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Babe라는 영화 에도 나오듯이 매우 영리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깔끔한 동물이라 서양에는 돼지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가정이 제법 있을 정도이다.
돼지는 다산의 상징으로 이발소 그림의 소재가 되고, 고사상의 단골 제수로우리에게 친숙하며,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로 활동함으로써 우리에게 재미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순진해서 귀여우며 게다가 맛도 있다.
서공렬 <콜럼비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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