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트릭스’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와코우스키 형제가 만든 최신작 ‘V는 복수’(V is for Vendetta)는 타임지로부터 ‘꼭 봐야할 영화의 하나’로 꼽힌 화제작이다. ‘미래에 대한 냉철한 비전’이란 선전 문구가 붙은 이 작품의 무대는 미래의 런던이다. 미소간의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영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기독교 광신도가 지배하는 이 나라는 나치를 능가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갖추고 국민을 상대로 생체 실험도 서슴지 않는다. 한 TV 프로그램 제작자는 권력자를 풍자했다 체포된 후 집에 코란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다.
생체 실험장에서 살아남은 사나이가 혼자 테러를 통해 정부 전복을 꿈꾸며 결국 국회 의사당 폭파를 통해 이를 성공시킨다는 것이 줄거리다. 한편으로는 황당무계한 액션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유럽에서 가장 먼저 의회 민주주의를 꽃피운 영국이 독재 국가로 추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주 영국에서 런던 히드로우 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10대를 동시에 폭파시키려던 계획을 세우던 대규모 테러 조직이 적발됐다. 이들은 과거 알 카에다 조직이 흉기로 승무원을 위협해 비행기를 납치하거나 구두에 폭발물을 숨겨 가지고 폭파하려고 기도했던 것과는 달리 액체 폭탄을 이용해 비행기를 날려 버리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9/11 이후 조종석이 여객실과 차단돼 비행기 장악이 예전처럼 쉽지 않고 공항 검색이 강화되자 검색기로 적발이 어려운 액체 폭탄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폭탄은 일상 용품으로 쉽게 만들 수 있으며 일단 기내에서 터지면 당장 비행기를 파괴하지는 못하지만 기체에 구멍이 나게 되며 이는 결국 기체의 공중분해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놀라운 것은 주모자들이 대부분 영국에서 자란 파키스탄계 이민자들이란 사실이다. 이들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주민들은 “평소 행동으로 봐 결코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영국내 회교도 커뮤니티 인구는 160만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의 3%미만으로 프랑스의 9%에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유럽에서 가장 극렬분자가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TV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22%가 지난 번 런던 지하철 테러가 “잘 한 일”이라고 믿고 있으며 24세 이하는 거의 절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회교도의 15%는 근본주의자며 81%가 자신은 영국인이기에 앞서 회교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나 독일은 물론 이집트나 요르단보다도 높은 수치다. 18~24세 사이 회교도 젊은이의 1/3은 엄격한 회교 율법 하에서 살고 싶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정서가 보편화 돼 있는 한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길러내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제2, 제3의 지하철 테러와 비행기 폭파 기도가 계속될 경우 일반 영국인과 회교도 이민자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코란을 읽는 것을 규제하는 법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다. 한 사회가 이민자 그룹 포용에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다행히 미국 내 회교도들은 훨씬 더 미국 사회에 동화돼 있으며 극렬주의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도 9/11 직후부터 미국내 회교도들이 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이들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오히려 이들을 감싸고 있다.
테러 기도를 적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없애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법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한 때 회교권을 식민지로 뒀다는 이유로, 혹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해 회교권 노동자들을 수입하는 바람에 상당 규모의 회교 커뮤니티가 있지만 이들은 별개의 사회로 존재해 왔다.
자생 테러 조직의 잇단 적발은 더 이상 유럽이 이를 방치해 둘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를 하루아침에 바꿀 묘책은 없다. 미국도 미국이지만 유럽이야말로 회교도와 테러로 인한 고민을 오래도록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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