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극작가 주 평
친구들과 정신없이 어울려 놀다가 서산마루에 저녁노을이 깔릴 무렵, 다른 아이들은 집을 향해 뿔뿔이 헤어져 간 뒤에 저를 맞아줄 어버이가 없어 길바닥의 돌뿌리를 발로 걷어 차며 노을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는 고아의 외로움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나무가지 위에 지어놓은 둥지가 모진 비바람에 부서지고, 어미새 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슬픔을 안고 허허벌판에 나래접고 웅크리고 있는 아기새의 슬픔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의 한자락이 떠오른다. 내가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거제도 ‘관포’란 갯마을에 살았을때 ‘재덕’이란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싸여 죽고 어머니마저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끝내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기에 그는 슬픈 동화속의 주인공같았다. 더구나 재덕이는 그가 얹혀 살고있는 삼촌집의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혼자 외돌아 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외톨이라고 부르며 따돌렸다.
재덕이는 저녁노을이 질 때면 방파제 끝에 서서 아버지를 삼키고 간 바다쪽을 바라보는 습성이 생겼고, 또 고추잠자리가 나는 계절이면 싸릿대 가지끝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바라보며 그도 고추잠자리처럼 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관포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고 나에게 말했는데 그럴때마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었다.
그런데 재덕이에게 타지(他地)로 이사가는 그의 삼촌 식구를 따라 관포마을을 떠나는 날이 왔다. 내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을 때, 재덕이를 태운 여객선이 방파제를 빠져나가며 목쉰 뱃고동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객선을 향해 “재덕아 잘 가거라!”하고 소리쳤다. 나는 재덕이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재덕이와 고추잠자리>라는 제목의 장편 동극을 얼마전에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60년전 옛날 내 추억 속에서 사라져간 내 친구인 고아 재덕이의 사연에 겹쳐 되살아나는 또 하나의 고아의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콩쥐팥쥐> Santa Raza 공연때 일이다. 우리는 그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입양고아와 그들의 양부모 80여명을 극장으로 초대했었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에 나는 무대막 틈사이로 2층에 자리잡은 그들 입양아들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그들은 어릴때 떠나온 미지의 고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흥분되어 있는 눈빛이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검정치마 흰저고리에 검은 고무신에다 버선발의 동네 처녀들이 우리 가락에 맞추어 춤추며 무대에 나타나자 이들은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분명 그들도 한국에 살았더라면 저렇게 차려 입고 우리가락에 맞춰 춤을 추었을 것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극이 진행되면서 궁전잔치에 가는 장면에서 계모와 팥쥐는 궁전으로 떠나가고 혼자 남겨진 콩쥐가 마루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리자 그들의 감격과 흥분은 슬픔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새들이 나타나 부르는 “아가씨 아가씨 콩쥐아가씨 울지 말고 울지 말고 일어나세요.”라는 슬픈 노래가 무대에 퍼지자 그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아인 콩쥐의 슬픔이 바로 그들이 쓰리게 겪고 있는 슬픔,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어릴적, 저녁 노을에 방파제 끝에 서서 바닷쪽을 바라보던 재덕이,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어 내가 꾸민 연극을 바라보면서 저를 낳아준 엄마의 얼굴과 태어난 조국을 상상으로 그려보며 울음을 터뜨린 입양아들의 모습이 오랜 세월을 두고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연인데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한국과 우리 이민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혼문제로 인해 생겨나는 반쪽고아들의 (특히 엄마 품에서 자라지 않는) 슬픈 사연을 본다. 견디기 힘든 가정폭력을 제외하고는 “하루를 참으면 백날이 편하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담고 산다면 반쪽 날개가 찢기어 날지 못하는 새같은 반쪽고아는 양산(量産)되지 않을텐데 말이다.
결혼이 어찌 당사자들만의 행복추구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낳은 자녀의 행복 또한 중요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혼이란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모들의 갈라짐이 동심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되고, 그 멍자국이 두고 두고 아물지 않아, 그 상처로 아파하는 반쪽고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 노을에 선 고아의 외로움을 생각하고, 둥지가 모진 비바람에 부서지고 어미새마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슬픈 아기새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또한 신앙인(信仰人)이든 비신앙인이든 ‘행복한 가정은 천국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라는 진실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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