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작>
서정현
세월이 한번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바람같은 믿음이 진실을 증명하듯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이제는 용기도 사라지고 오기로 버틸 수도 없으니 내 신세가 참 우습다구 해야할지, 기가 막히다구 해야할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온갖 궁리를 다 해보지만 또 내일도 뾰족한 수가 없이 같은 일과가 반복될 것이다. 골프장 나무 그늘에 앉아 하늘 쳐다보고 땅 쳐다보고 해 질 때를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놀고 먹는게 미안해서 식탁에 편히 앉지도 못하고 엉덩이 반쪽만 걸치고 아내 눈치를 살핀다. 비싼 반찬에는 차마 젖가락이 가지 못하고 값싼 김치와 다꾸왕만 아작아작 씹어 먹는데 아내는 행주를 짜다말고 뒤돌아보며 돈도 못버는 사람이 웬 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느냐고 핀잔을 준다.
언제 부터인가 내 맘 한 구석에 아내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울화가 치밀어 가출하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노렸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욕을 한바탕 퍼붓고 준비된 가방에 준비된 옷가지를 쑤셔넣고 밤중에 집을 나와 버렸다. 나는 이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내가 떠난들 나를 아쉬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와서 나를 퇴물취급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자격지심이 쌓이고 쌓여서 분노로 변해갔다. 자욱한 밤안개를 헤치며 샌버나디노 산맥을 넘어가는 가출하는 중늙은이의 심정이 어떠하랴. 세상 헛살았다는 후회스러움에 눈물이 흐르고 한숨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한자루 담아서 아내 앞에 패대기를 치기 전엔 절대로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집 떠나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텐데 벼라별 잡념이 다 떠오르고 살얼음판을 딛고 살아온 25년간의 이민생활이 어두운 차창가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하루아침에 시청 월급쟁이가 사표를 쓰고 미국에 왔던 날 LA 하숙집에서 담배 두 갑을 피워물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막막했던 25년전 그 밤이 어제 밤 일 처럼 다가왔다. 시계 장수, 재봉사, 주방장 ,페인터 등등 나를 포함해 여덟명이 북적거리는 하숙집엔 직업은 가지각색이지만 공통된 희망사항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합법적 신분을 만드나” 밤이면 모여앉아 전문가 실력으로 정보가 교환되고 수군거려 보지만 돈이라는 벽에 부딪치면 모두들 한 숨을 쉬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이 곳에서 얻어들은 정보는 내 미국생활에 길잡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돈이 없으면 영어라도 잘하고 그것도 못하면 몸으로 때워야지.
몇달간의 페인터 헬퍼 생활을 청산하고 알라스카 벨링해 해안의 어장을 찾아갔다. 지도에 이름도 없는 작은 모래밭에 창고 하나만 지어놓은 일본계 수산회사 지점이였다. 새우와 게를 배에서 내리면 크기별로 구분해서 임시로 냉동창고에 보관하는 일인데 두 명의 에스키모인과 한국 사람 세 명, 일본인 매니저 여섯명의 직원들은 창고 구석에 방을 만들고 그 곳에서 기거하며 정해진 작업 시간도 없이 밤이건 낮이건 배가 들어오면 일하고 강풍이 불고 배가 오지 않으면 쉬는 시간인 그런 작업환경이었다.
내가 도착하니 한 사람의 한국인은 2년간의 취업이민 근무 조건을 마치고 큰 도시로 이사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도 눈 딱감고 한국에서 군대생활 2년 더 하는 셈치고 참고 견디기로 했다. 북극해의 매서운 찬바람과 장갑을 뚫고 들어오는 새우 가시정도는 한달정도 경험해보니 요령이 생겼으나 만성기관지염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발한 것이였다. 처음에는 감기정도로 알고 약을 먹어 보았으나 열이 점점 심해지고 기침이 계속되었다. 작업중에 심한 기침을 하고 가래를 닦아내는데 손바닥에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매니저는 깜짝놀라 본사헬기를 부르고 나는 앵커러지 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다른 병원에 수소문하여 한국인 간호사를 전화로 찾아 삼자 통역을 하는 진풍경이였다.
진찰을 끝낸 후 다행히 폐에는 이상이 없고 기관지에서 피가 터져나왔다는 간호사말에 안심을 하고 사흘간 입원하기로 했다. 병실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이 곳에 누워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권은 이미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어장에서는 겨우 두 달간 그것도 병치레해가며 일한 나를 직원대우 해 줄리는 만무하고 내가 타고온 헬기 값이며 병원비를 무엇으로 감당해야하나. 그리고 값을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신고를 한다면…
불안한 마음은 끝없이 이어지고 궁리 끝에 병원을 몰래 빠져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병원엔 이름 석자 적어 놓은 것 뿐인데 설마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이틀째 되던 날 먹던 약봉지와 보따리를 싸는데 어장 매니저가 예고도 없이 불쑥 병실을 들어섰다. 내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 내 몸은 굳어 있었다. 그는 봉투를 내밀며 병원비는 모두 지불했고 보너스 한달치를 더 줄테니 몸 건강하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지 그 뒷 모습을 바라보고 허리를 굽신 거리며 탕큐탕큐만 연발했다. 미국이 좋긴 좋다는 사실을 처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병원을 나오며 나를 도와준 간호사님께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하니 그는 내가 너무 안 됐다며 자기네 집에서 저녁이나 한끼 먹고 떠나라고 하신다.
오랫만에 사람답게 사는 가정을 방문했다. 벽에는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옆에는 사각모를 쓴 그 집 아들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엔지니어 취직을 해서 이제는 한시름 놓았다는 간호사님의 흐뭇한 미소에 내게는 요원한 별천지 사람들의 생활을 보는 듯 했다. 나도 저런 사람들처럼 가족과 함게 사는 삶이 찾아 올 수 있을까. 꿈같은 생각이였다. 얼마후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기로 했다. 공항 대합실에 앉아 LA에서 적어온 주소들을 훑어 보았다. 바다쪽은 내 체질에 안 맞으니 내가 어릴 적 살아 보았던 농촌지역을 찾아가리고 했다.
아이다호 주 감자 농장이였다. 보이쎄 공항에서 세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간 곳엔 앞아인이라고 써붙인 농장 간판이 붙어 있었다. 농장주인은 내 모습을 보더니 탐탁치 않은 말투로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묻는다. 기관지염에 시달린 내 얼굴은 중병환자 모습이였고 비쩍마른 체격에 농장일을 해낼 것 같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오기 전 한국인 최씨성을 가진 농부가 농장취업으로 2년 일하고 소원 성취하여 떠났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뒤 돌아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게 한 달간 여유를 주고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그 때 가서 정식 계약을 하자고 했다.
병원에서 가지고 온 약을 정성스럽게 먹어가며 몸을 추스리고 십 여명의 선배 농장 일꾼들을 따라 다니며 일을 배워 나갔다. 농기구 다루는 법, 소똥 치우는 법, 생소한 일이지만 이정도면 어장일보다 편하고 참고 견딜만한 일이었다. 농부들은 하루 여덟시간 작업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해뜨면 농기구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두워져야 일이 끝나는 일과였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불만을 늘어 놓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 에이커 농장은 산 쪽으로 소사육장이 있고 산비탈 아래로는 감자 농장이 펼쳐져 있다. 이 곳의 날씨는 언제나 편서풍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어오는데 사육장을 거쳐 오는 바람냄새는 그날 그날의 소먹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곳이다. 심한 경우에는 소똥냄새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따갑기도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한 달이 지나갔다. 감독이 나를 좋게 평가했는지 취업으로 정식 싸인을 하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몸이 근질근질 가렵고 목 주위에 빨간 물집이 생기더니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농장 주인의 예약으로 30마일 떨어진 병원을 트랙터를 몰고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찾아갔다. 진단결과는 소똥 앨러지라고 했다.
주인은 내 체질이 기후에 적응하고 면역이 생기면 좋아길 것이니 참고 견디라고 하지만 의사 말대로 그 때가 언제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회를 포기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차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뉴욕으로 향했다.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부르클린 후랫 벗쉬 애비뉴에 위치한 과일 가게였다.
“무경험자 야채가게 종업원” 내가 겪어 본 노동중에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하는 곳이 뉴욕의 야채가게가 아닐까 싶다. 종종 걸음으로 가게 안을 뛰다보면 하루가 지나고 일 주일이 훌쩍 가 버린다. 근심많고 탈도 많은 나같은 군상들이 틀어박혀 있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고 육체노동 시간만 반복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사량이 두 배로 늘어나고 팔다리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몸이 불어나니 입던 작업복이 맞지 않아 수시로 옷을 사 입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이무렵 함께 일하는 동료로 부터 단체 투자자의 일원으로 가입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요구하는 목돈이 없으니 있는 돈 다 털어넣고 매월 갚아 나가는 조건이지만 드디어 내게도 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찾아왔다. 무작정 손 놓고 있을 때 보다는 한결 마음이 든든하지만 룸 메이트 비용에 월부 갚고 나면 언제나 빈손이였다.
궁핍함과 외로움은 견딜 수 있지만 초조하게 기다렸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속의 침이 마를 지경이다. 일을 진행하는 동안 수시로 터져 나오는 탈법 이민기사, 까다로운 절차와 확인, 하루 한날 발뻗고 잠잔날이 있었을까.
그런 복잡한 일과 속에서도 미국 속의 한인사회는 좁다는 것을 실감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날 헌츠 포인트 과일 도매상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앨라스카 어장에 찾아 갔을 때 큰 도시로 떠난다며 짐을 싸준 동료를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그 친구는 나를 껴안고 내가 폐병으로 죽은 줄만 알았었는데 살아서 만나니 반갑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선물을 한아름 싸들고 그의 아프트를 찾아갔다. 원 배드룸에 두 아이와 부부, 네 식구가 바글바글 살아가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내 처지와 비교가 되어서인지 오밀조밀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궁전에 사는 왕자들 모습으로 비쳐졌다.
3년이면 된다던 일이 또 미루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4년이 지나서야 일이 마무리 되고 내게도 광명천지가 찾아 왔다고나할까. 이제는 서울의 가족을 불러 함께 살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미국에서 해 본 건 과일 장수 하는 것 밖에 없었으니 뉴욕에 눌러 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신분에 변화가 생기니 다른 마음이 생겼다. 중소 도시에 가면 교육환경에 좋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떠나보기로 했다. 콜로라도 덴버에 도착하니 청소사업을 함게 하자는 지인을 만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헤어진지 6년만에 공항에서 만나보니 아내는 기다림에 지쳐 주름진 아낙의 모습이였고 아들은 어릴 때 모습을 찹아볼 수 없고 나보다 키가 더 큰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딸은 두 살 때 헤어졌으니 내 얼굴을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여덟 살이 된 딸아이의 손을 잡아주니 내가 낯선 아저씨의 모습인지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외면한다. 이산가족의 상봉은 어색하고 덤덤한 만남이였다. 아내는 나 혼자 어렵게 살아가리라고 짐작했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온전한 밥그릇 하나 없이 떠돌이 처럼 사는 모습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아내는 다음날 팔을 걷어 부치고 일하러 가는 나를 따라 나섰다.
다섯명이 일하던 빌딩청소를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달라 붙어 해치우니 돈이란 걸 그 때부터 만져보게 되었다. 밤을 새워 일해도 힘든 줄 모르고 현관에 들어서면 나란나란 놓여있는 신발만 보아도 가슴이 셀레이고 방문을 열어 보면 토끼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공부하는 모습에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가까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3년만에 집을 사고 다음해에는 빌딩내에 있는 세탁소도 우리 이름으로 만들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아침 해가 떠 오른다.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며 몇 년후에는 7층 빌딩을 통채로 사 버리자고 깔깔대며 웃기도 했다. 우리 가족의 암울했던 시절도 까마득히 잊혀질 무렵 예상치 못했던 일이 다가왔다. 과로한 아내는 갑자기 쓰러져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돈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고 보험을 생각지도 않던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에는 내가 간경화증세가 있어 병원과 중국 한의원을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우리 내외가 먹고 살만하니 죽을 병에 걸렸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모은 돈은 다 빠져 나가고 아내와 나는 마주않아 우리 팔자에 돈 복이 요것 밖에 안되니 잊어버리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럴 즈음 커가는 자식들에겐 학교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기는 시기였다.
자식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역시 자식들 시험 점수에 목을 매고 하루희비가 엊갈리는 단순한 부모였다. 시간표대로 커가는 자식들은 대학 대학원을 캘리포니아로 옮겨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집안은 텅 비어 있고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나의 초청으로 이민을 온 서울 동생은 서부쪽에 정착한다고 연락이 왔으니 우리도 이런 기회에 차라리 피붙이가 옆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하고 삶의 터전을 옮겼다.
어디가서 살아도 마찬가지겠지만 손에 쥔 재산이 없으니 늘 초조하기는 마찬가지고 더구나 평생 병을 지니고 살아가야하는 나 때문에 가족들 마음까지 부담을 주는 처지가 되었다.
부모 형편을 이해하는 자식들은 다행히 자기들 스스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게 되었지만 학교 다닐 때 넉넉히 도와주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평생의 짐으로 남았다. 아들은 내과의사가 되어 집안의 페이먼트를 제 이름으로 돌려놓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딸 아이는 변호사가 되어 첫 월급을 받던 날 아빠도 이젠 문화인 행세를 하시라며 골프채를 사들고 들어왔다. 늦게나마 취미를 갖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내 인생의 작은 변화가 아닐까. 우리 가정의 변화는 이것 뿐이 아니였다. 며느리를 맞이한 것이다.
명랑하고 착한 마음씨, 누가 내 일생중 최고의 행운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 며느리를 만난 것이라고”
자식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권이 넘어가니 아웅다웅 살았던 내 일생이 나이와는 상관없이 한풀 꺾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과거’라는 말이 입속에서 스스럼없이 되뇌어진다.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이 그 당시엔 왜 그토록 안타까웠던가, 죽느니 사느니해도 세월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사람 사는 이치를 지금은 알 것도 같은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살아온 미국 이민생활을 되짚어 살으라면 손사래를 칠 사람이 어디 나 분이겠는가.
아내가 구박해서 못살겠다는 ‘핑계’, 돈을 따 보겠다는 ‘욕심’, 핑계와 욕심으로 달려온 곳은 라스베가스였다. 싸구려 모텔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저곳 헤매어 보았지만 이 바닥에서 돈따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아내 몰래 숨겨온 돈은 몇일만에 날아가 버리고 카드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니 열불이 솟아 오르고 따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본전만 찾으려는 절박한 심정도 번번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집에 소식도 끊고 두달간 이곳을 헤매였으니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홈레스의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모텔방에서 라면을 끓이며 비싼 계란을 넣을까말까 계란 하나 들고 망설이는 기막힌 처지가 되고 보니 팔팔 끓는 라면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텔에서는 10시까지 숙박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아들고 이제서야 아내의 무서운 얼굴이 떠 올랐다. 난감한 내 신세가 후회스러웠지만 아내에게도 정겨운 구석이 있다는 한가닥 기대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갈 개스비를 만들려고 가방 밑에 깔린 동전 긁어 모으는 소리가 노름꾼의 마지막 절규처럼 들여왔다.
조금 덜 야단을 맞으려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저녁시간을 택해 고개를 푹 숙이고 집을 들어섰다. 아내는 옷 보따리를 발로 걷어차며 “거지 행세하고 들어올걸 왜 큰소리는 치고 나갔소”쌩하니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서 2층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짧은 환영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 입맛에 꼭 맞는 커피를 잔이 철철 흘러 넘치도록 부어준다. 커피잔을 받아든 내 손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며느리는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용감한 우리 아버님 화이팅”딸아이는 등 뒤에서 속삭였다.“아빠 솔직히 얼마 잃었어?” “왜 갚아 줄래?” “응”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자는 약속을 하고, 크레딧 카드 빚덩어리를 딸에게 넘겨 주기로 했다.
아들은 그동안 병은 없었는지 진찰을 해 보자며 청진기를 내 가슴에 대고 축 처지 어깨를 바라보면서 “세상 사람 뭐라해도 아버지는 그럴 자격 있습니다. 돌아다니시면서 하고 싶은 것 하시며 사세요” 자식의 조용한 말 소리는 얼굴 붉히는 아내의 꾸짖음보다 더 무섭게 들려왔다. 아직도 내 머릿 속은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내가 살아온 길을 도박에 비교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내 인생 도박은 이만하면 본전은 건졌다”
잠자러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리빙룸에서 열심이 TV 채널만 돌리는데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는 아내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보다 길게길게 이어지는 기도 속에는 분명 나의 죄도 사하여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내일은 신문 구직난이라도 찾아 보아야겠다. 놀고 먹는게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한지, 집 나가면 고생이란걸 몸소 체험도 해 보았으니 65세가 아니라 70이 넘어도 내 근력을 유지할 수 있는 날까지 움직이며 살아야겠다.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일터로 나서 저녁에 돌아오는 것, 이것이 내 적성에 맞고 떳떳한 인생이란 걸 새삼 느끼는 밤이다.
당선 소감
사람 속을 뒤집어 보면 공통된 욕심 한 가지가 있다. 아둥바둥 살아도 늘 남에게 뒤쳐져 있다는 조바심. 인간에게 뛰는 재주만 있고 날으는 재주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걷다보면 소도보고 중도보고, 이것 또한 사람사는 공평한 이치가 아닐까.
지금 내 이름은 ○○씨에서 ○○ 할아버지로 바뀌었다. 이제서야 그 흔해빠진 사랑이란 단어의 참 뜻을 깨달았으니 지난난들은 무심하고 삭막했었나 보다.
재미 없던 내 이민 생활을 웃음으로 봐 주신 한국일보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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