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작> 노재경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엄마한테 전화할 때마다 “그동안 잘 있었어?” 대신 듣는 인사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홍길동의 누나 홍길순’이 되어 여기 저기 싸돌아다니며 남의 얘기 듣고, 들은대로 전달하는 일을 해온 탓이리라. 1986년 3월 초 통역사란 직업에 겁없이 뛰어든 후 천직으로 삼고 이 일을 해온 지도 꼬박 20년이 되었다.
통역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를 위해 나는 통역을 해 온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외롭고 답답하고 힘들기 한이 없었고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던 80년대 초의 “나”인 셈이었다. 열 아홉의 나이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하고 싶은 얘기를 한마디도 영어로 말할 수 없었다. 그 답답함을 들어줄 사람도, 호소할 수 있는 데도 없었다. 통역 도움을 청할 곳은 더더욱 없었기에, 혼자서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나”를 떠올리며 “나”에게 필요했던,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통역사가 되려고 쉬지 않고 노력해 왔다. 한편 그러한 노력은 대학 다닐 때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방학 때 학교 기숙사 방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 통역하기 위해 출장 다니며 호텔에 투숙할 때마다 힘들게 기숙사 방을 청소하던 “나”를 떠올리며 내 호텔방 청소하는 사람의 일을 가급적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과 그 취지에 있어서는 비슷하기도 하다.
내가 원했던 그 통역사는 그동안 하고 싶어도, 마땅히 해야 하는데도 할 수 없었던 나의 얘기를 내 곁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준다. 어떻게 보면 영화의 엑스트라와 흡사하기도 하다. 비록 영화 각본에 그 통역사를 위해 쓰여진 대사는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엑스트라 역을 맡아 열심히 연기를 한다. 그 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함은
물론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연기가 끝나면 그 엑스트라를 기억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의 얘기는 모든 이가 들었고 기억을 한다. 비록 “나”의 귀와 입이 되어 줄지언정 “나”의 통역사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나”를 대신하여 결코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나”의 통역사는 “나”라는 주인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역사의 인생이란 바로 영화의 엑스트라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만일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를 휘날리며” 영화에 수 많은 엑스트라의 등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꼭 필요하지만 그 중요성이 인정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을 1인 다역의 엑스트라 배우가 되어 지난 20년 동안 숨도 안 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려왔다. 매일 매일 어떤 새로운 엑스트라 역이 내게 주어지는가의 기대와 흥분 속에 뛰어온 지난 20년의 미국 생활이다. 돌이켜 보면 길다면 길 수 있는 그 20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매일 하는 일, 남의 얘기만 전달하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내 자신의 얘기를 펼치고 싶다. 오랫동안 통역하면서 내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얘기들을 몇 꼭지 꺼내 아끼는 벗에게 털어놓고 싶다.
첫번째 편지 – 3중 살인 사건과 함께 루이지애나주에서 보낸 여름
보고 싶은 친구에게,
오늘 새벽 몇 벌 안되는 여름 정장을 모두 짐가방에 넣어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단다. 3중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미 남부 루이지애나주 한 고등법원의 통역일을 맡아서지. 이번 출장은 언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특이한 출장이다. 한국인 세 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사건의 한국인 피고가 재판 시작 전 유죄를 인정하고 종신형을 받아들이면, 나는 호텔에 가서 짐을 풀 필요도 없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피고가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유죄 판결 후에 받게 될 사형선고의 위험도 무릅쓰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유죄를 부인하게 되면, 나는 본격적인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곧 예측불허의 그 날까지 루이지애나주에 남아 통역을 해야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네가 “언제 집에 올거야?” 물었을 때 “그건 나도 몰라”했던거지.
뉴올리언즈 공항 도착 후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적절한 통역사를 구하지 못해 그 피고가 1년째 수감되어 있는 주형무소로 향했다. 형무소에서 피고와 변호사가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여 통역하는 것이 나의 첫 공식 임무였단다. 내가 집에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 사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 변호사는 다음 날 아침 법원에 출두했을 때 의뢰인인 피고가 유죄를 인정할지 무죄를 주장할지를 알아야만 변호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마련했던거야.
오른쪽 눈과 목에 심한 총상을 입은 피고는 일회용 컵을 들고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침을 뱉었고, 목의 부상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가 상당히 어려웠단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사건과 관련없는 얘기들을 나누며 그의 목소리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지. 그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해도 내가 정확히 알아듣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피고에게 노트북과 펜을 항상 제공해줄 것을 변호사를 통해 판사에게 요청했단다. 여러번 반복해도 못 알아들을 때는 공책에 써서 내가 보면서 통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 날
도착 다음 날 피고는 무죄를 주장했고, 바야흐로 피고 및 검찰측은 본격적인 재판 준비에 들어갔으며, 나는 법원 근처 호텔의 장기 투숙자가 되었단다. 법원에서 내가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증언대에 서는 일이었다. 통역 예정자의 적격성을 조사하는 심문 절차에 통과하기 위해, 약 3시간 가량 판사, 변호사 및 검사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만 했지. 다행히 그 절차가 순조롭게 끝나 이 사건의 통역으로 확정된 후, 60대 후반의 판사는 먼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루이지애나라는 곳으로 혼자 비행기 타고 날아온 내 처지가 딱하게 보였던지 아무때나 전화하라며 자신의 집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고 (핸드폰이 등장하기 전이었다), 법원 서기 두 명에게 내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줄 것을 지시했다. 그 서기들의 집에 데려가 내게 맛있는 것도 먹여주며 내 친구가 되어주라는 말도 덧붙였단다.
나의 증언이 오전에 끝나자마자, 곧 내가 통역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자 마자, 피고는 판사 앞에서 무죄를 주장했고 배심원 선정 절차가 점심 시간 후 곧바로 시작되었다.
재판
배심원 재판이기에 배심원을 선정해야만 했다. 250명 이상의 배심원 후보 중 12명의 배심원과 2명의 교체 배심원이 선정 절차 시작2주일이 지나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단다. 그 지역 언론에서 너무 많이 다룬 3중 살인 사건인지라 언론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배심원 14명을 수행 경찰관 외에 아무도 모르는 호텔에 투숙하게 하여 격리시켰단다. 그 비용이 엄청나서 주말도 쉬지 않고 주 7일 재판이 진행되었지. 단지 하루만 재판을 진행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호텔에 들러 나와 함께 법원으로 가기로 한 맘씨 좋은 판사의 차가 물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보통 법원 서기가 호텔로 와서 법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호텔로 데려오곤 했는데 가끔 판사가 자청해서 내 호텔에 들러 친구처럼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법원으로 같이 가곤 했단다. 다행히 그 날은 비 덕분에 내가 쉴 수 있었던 유일한 하루였던 셈이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진행된 재판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그건 피고 옆에서 아무런 통역 장비도 없이 속삭이며 동시 통역한 것도 아니고, 증언대에서 한국인 증인들을 위해 통역한 것도 아니란다. 3중 살인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찍은 수많은 사진들, 즉 흥건한 피와 함께 숨져 있는 피해자들의 사진들이 변호사나 검사가 관련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증인들에게 제시되었는데 그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진들을 같이 봐야하는 것이었단다. 밤마다 낮에 본 그 사진들 때문에 악몽에 시달려 깊은 잠을 못자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일어나 아침에 샤워할 때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60년 영화 “싸이코 Psycho”가 떠올라 목욕하는 것도 고문이었단다. 밤마다 내 호텔 방으로 찾아든 모기들 또한 나의 피로 하루 세끼를 채우는지 부지런히 내 몸을 물었단다. 깨어있을 때는 모기들에 시달리고 간신히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지.
마침내 배심원 선정, 검사측과 피고측의 증인 및 증거물 제시 등이 끝나고, 배심원들이 피고의 유무죄만 결정하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렀다. 만장일치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배심원들이 토의를 심각히 하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이란 법원 안팎을 서성거리며 마냥 기다리는 거란다. 이 때는 언제 결정이 나올지 아무도 몰라 호텔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 집 생각도 하면서 허리케인때문에 뿌리채 뽑혀나갈 듯한 커다란 나무를 창가에 서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변호사가 달려나와 통역하란다. 27일간의 재판은 피고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는 피고측 주장을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 피고에게 무죄평결을 선사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날 저녁 나는 그 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단다.
잘있어라. 만나서 긴 얘기 하자꾸나.
두번째 편지 – 또 “피”를 보기는 끔찍하게 싫지만…
보고 싶은 친구에게,
오늘 아침 뉴욕에 있는 한 통역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뉴올리언즈에서 한 달 후에 “치아이식”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최초로 개최되는 데 시간이 있느냐는 문의 전화였다. 이미 잡혀있던 통역일이 없어 시간이 있다고 일단 알렸단다. 계약서가 곧 팩스로 보내지고 나는 그 순간부터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있어 뉴올리언즈시에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다고만 말했지, 그 당시만해도 내게는 아주 생소하기만 했던 “치아이식”에 관해 동시통역을 할 수 있다고는 차마 말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전화한 사람은 시간이 있다는 것과 전혀 모르는 주제에 대해 동시통역할 수 있다는 것을 동일시 했던 것 같다. 나같아도 그랬겠지만.
계약서가 오고 본격적인 통역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라 학술대회를 주관한 치아이식 장비 회사에 수차례 전화해서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자료를 받아 읽어보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통역을 못하겠다고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고 앞이 캄캄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시통역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대한치과의사협회 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말하고 치아이식 관련 기사가 실린 회보를 모아 보내줄 수 있느냐는 힘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 기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북가주 지역의 한인업소록을 펼쳐들고 한인 치과의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치아이식에 대해 치과 진료실에서 만나 플라스틱 모델을 갖고 설명해줄 수 있는지, 한국에서 치대 다닐 때 공부하던 교과서가 있으면 혹시 내가 빌릴 수 있는지 문의하기 위해 전화를 했단다. 업소록에 나온 모든 치과의사들에게 염치없음과 뻔뻔함을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지만 열이면 열 모두 바쁘다며 전화를 끊어서 포기하려는 찰나 한 의사가 놀랍게도 점심 시간 중에 잠시 시간이 있으니 사무실에 들러도 좋다는 말을 했다. 친구야, 이 때 나는 횡재한 느낌이었단다.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지. 플라스틱 모델을 가지고 그 의사는 친절하게 찬찬히 치아이식에 관해 내게 설명을 해주며, 전화로 부탁한 치대 교과서까지 잊지 않고 그의 책꽂이에서 꺼내 챙겨주셨단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그 분의 이름은 잊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지니고 있단다. 누군가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나도 그 분처럼 사람을 대해야지’하는 것도 배웠고.
80시간 이상 치아이식 관련 공부를 하고, 동시통역부스에 들어가 앉았지만 실제 통역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단다. 뭐가 어려웠는지 아니? 치아이식 수술 절차나 자주 나오는 전문 용어들이 아니었어. 그런 것들은 통역 준비를 위해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거든. 제일 힘들었던 것은 학술회의 참석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실제 환자에게 실시하는 치아이식 수술 과정을 같이 보면서, 한마디로 피를 보면서 통역하는 것이었단다. 내가 피에 예민한건 너도 잘 알지? 그 수술 과정을 보며 통역하다보니 – 보아야만 연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거든 – 속이 메스꺼워 음식 생각도 사라지고, 식사를 거르니 배고파 정신 집중도 안되고 했단다. 그 사정을 누구한테 호소하겠니? 너니까 이렇게 말한다.
잘 있어.
오후 내내 피를 봐서 저녁도 못먹은 배고픈 친구 재경이가 힘없이 몇 자 썼다.
세번째 편지 – 아버지와의 짧은 대화
친구야,
이 편지는 멀리서 쓴다. 어제 너와 맛있는 저녁 식사를 같이 한 후 집에 오자마자 짐 싸고 오늘 아침 동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 도착 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와서 저녁을 대충 떼웠는데 시차 때문에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눈이 감긴 것 같다. 이럴 때는 출장만 오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외로움 때문에 오히려 잠을 잘 수 있는 편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싼 전화비 때문에 너에게 쉽게 전화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기 때문에.
깊은 잠에 들어 꿈까지 꾸고 있는 데 꿈에서도 내가 깊은 잠을 자고 있던거 있지. 너무 웃기지 않니? 열심히 세상 몰라라 하고 자고 있는 데 꿈에서 전화벨이 크게 울렸어.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지.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니? 바로 우리 아버지셨어. 나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갔는데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오신 거였어.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 당장 만나자고 하려는데 아버지께서 내가 너무 피곤한 것 같으니 다음 날 만나자고 하며 약속 시간 및 장소를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었단다. 다음 날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가 아버지가 나타나시기를 한참동안 기다리는 중에 퍼뜩 생각난 것이 우리 아버지는 오래 전 내가 열 세살 때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단다. 그 생각을 꿈에서 하고 있는 중에 잠에서 깨어났단다. 잠깐 실망은 했지만 그 순간 나는 너무나 행복했단다. 저세상에서도 건강히 잘 계시니 당신 걱정 하지 말고 잘 살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단다. 미국에서 통역사로 일하며 통역일 덕분에 일본 동경에 와서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정말 꿈만 같았던 거 있지?
그 꿈을 꾼 후 너에게 먼저 알리고 싶어 간단히 몇자 썼다.
잘 있어.
마지막 편지 – 평양의 고요한 밤
보고 싶은 친구야,
오늘은 네게 해줄 얘기가 많아 편지가 길어지겠다.
미국무부 소속 한국어 통역사로부터 2002년 10월 말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통역할 일이 있는데 시간이 되느냐는 문의 전화를 받은 것이 그 해 6월경이었던 것 같다. 그때 시간이 된다고 말하자, 전화한 그 사람은 장차 국무부의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며 나의 통역이 필요한 10월 말 그 기간 중에는 아무런 통역일도 맡지 말라는 말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에 대해 거의 까맣게 잊고 있었던 9월 어느날 국무부의 통역 서비스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단다. 나의 통역이 필요한 장소가 평양이라는 사실을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지. 중국 북경을 통해 평양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중국 비자 발급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요청받았다. 아울러 나의 임무는 경수로 관련 양자 회담에서 미국측 대표들을 통역하는 일이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단다.
통역 준비를 위해 만사 제쳐놓고 정신없이 경수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마 10월 중순이 아니었다 싶다. 북한이 비밀 핵무기 개발을 시인함으로써 1994년의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는 내용이 전세계 신문에 대대적으로,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 1면 톱기사로 나온 것이야. 미국무부는 평양에서의 이번 회담은 아마 취소되기 쉬울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도, 같은 기간에 다른 통역일을 받지 말아달라는 상반된 부탁을 또한 내게 했다. 경수로와 씨름하며 쏟아부은 시간도 만만치 많았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매일 두번씩, 국무부 코리아데스크 직원과 통화하면서 평양을 가게될지 여부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으나 그는 나에게 확답을 줄 수 있는 권한도 없었고 그 자신 가게될지 말지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었단다.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이지.
가지말라는 명령도, 가라는 명령도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 ‘이제는 평양에서의 통역 기회는 없겠구나’라고 생각을 정리하고 평양 방문을 포기한 어느 날이었다. 일을 하다가 밥때를 잘 놓치는 내 버릇 때문에 그 날도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때늦은 점심을 혼자 먹고 있는데, 국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날 오전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샌프란시스코에서 타고 북경에 도착 후, 북경에 소재한 북한 대사관에 가서 평양가는 비자를 신청하여 발급 받고, 북경발 평양행 항공표를 구입해서 바로 그 다음날 평양을 가야한다는 전화였다. 나한테 전화한 코리아데스크 직원도 동부 시간으로 오후 5시가 넘어 퇴근 준비를 하는 중에 전화를 받아 들은 얘기를 나한테 전한 것이었다. 핸드폰은 평양 공항에서 압수하니 북경 호텔에 맡겨 놓고 가든지 아예 미국에서 가져오지 말라는 조언을 친절하게도 덧붙였다.
평양 도착 후 호텔에서 일단 짐을 푼 후 호텔 옆에 위치한 우표 가게를 찾았다. 그곳에서는 각양각색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표, 엽서, 지도 등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곳을 나오는 순간 칼라를 찾아볼 수 없는 흑백 세상을 갑자기 만난 것 같았다. 1957년 소개된 뮤지컬 “뮤직맨 The Music Man”에서 음악이 소개되기 전의 시골 동네를 만난 듯 했고, 1998년의 영화 “플레전트빌 Pleasantville”에서 칼라가 소개되기 전의 세상을 만난 듯 했다.
10월인데도 날씨는 무척 추웠다. 평양의 최고급 호텔이었지만 방에 난방이 제대로 안 되어 담요를 몇 장 더 부탁했다. 하지만 시차로 잠이 잘 오지 않아 덜덜 떨며 거실에서 채널이 2개 반인 – 채널이 반인 이유는 소리는 또렷이 들리는데 화면에 나오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TV를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밖을 또 한동안 내다 보았다. 밖은 너무나 고요하고 칠흑같이 깜깜해서 나갈 엄두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차소리,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만취한 사람 소리, 싸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그 자체의 고요함과 적막함이 짙게 깔린 거리를 바라보다 하늘을 잠깐 보니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이 되어 머리물비누(Shampoo 샴푸)와 머리영양물비누(Conditioner 린스)로 머리를 감고, 1층 식당에 내려가 중국어와 동유럽 언어들을 들으며 맛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점심 후에 약간 시간이 나서 호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텔이 “식당가”에 위치해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식당 사냥을 하기로 한 것이다. 식당은 많이 있었지만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외국인(주로 중국인)만이 왕래한다는 식당에 들어가 함흥냉면을 먹고 미화 달러로 돈을 냈다. 초록색의 더블민트 껌을 주길래 아무 생각없이 받았는데 알고보니 그 껌이 바로 내가 받아야 할 잔돈역할을 한 것이었단다. 미화 동전이 부족해 껌으로 대신 잔돈을 받은 것이지.
저녁은 호텔에서 했는데 마침 로비에서 TV 연속극 촬영을 하고 있어 한동안 넋을 잃고 구경했단다. 밤에는 영어가 남한과 북한에서 어떻게 다르게 번역되고 쓰여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신문, 잡지, 객실 규정 등을 찾으려고 호텔방을 구석구석 뒤졌단다. 찾은 것 몇개 여기 적는다. ‘브라자’ 대신 ‘가슴띠’, ‘수영장’ 대신 ‘물놀이장’, ‘스낵바’ 대신 ‘간이매대’, ‘핸드폰’ 대신 ‘손전화기’, ‘서명’ 또는 ‘싸인’(Signature) 대신 ‘수표’, ‘수표’(Check) 대신 ‘행표’. 마지막 두 개 때문에 은행가서 통역할 때 큰 혼란이 왔단다. 내가 왜 혼동했는지 상상이 가지?
금강산을 못 올라가 외국인을 위해 만든 영어판 “MT. KUMGANG”을 4일간의 체류 기간 마지막날 샀단다. 북경행 비행기 안에서는 이틀 전 평양에서 저녁을 같이 한 스웨덴 대사도 만났다. 북경에 돌아와서는 2년 전 만났던 중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 호텔을 찾은 그 친구와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오랜시간 얘기 나누고 돌아가는 친구에게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따라나왔지. 호텔에서 10분도 채 안되는 거리를 돌아올때는 나 혼자 길을 잃어 1시간 이상 헤매었단다. 나 자신 너무나 한심했어. 얘기하는데 몰두해 호텔 주변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썼던 탓이지.
어제 미국으로 잘 돌아왔다. 미국에 살고 있는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평양에서의 이런 통역 기회도 주어지는구나 생각하니 미국에 사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 어디로 무슨 통역을 하기 위해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힐끗 힐끗 엿볼수는 있어도 나의 삶은 전혀 보여줄 필요가 없는 그래서 외로울수도 있는 직업이기도 하고.
밤이 깊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또 내일의 통역에 지장이 없겠지?
나의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다시 남의 얘기를 소중한 나의 얘기하듯 전해야 겠다. 열연하는 떠돌이 엑스트라가 되어.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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