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극장 앞을 지나다 개봉한 지 한달도 넘는 영화를 보게된 것은 아마도 날이 너무 무더워서였을 것이다. 후덥지근한 저녁의 바깥과는 달리 극장안은 시원했다. 예상보다 많은(?) 27명의 관객들과 함께 본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닥칠 대재앙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냉방이 잘된 극장에 앉아 에너지 절약을 촉구하는 내용에 공감하려니 몸은 쾌적했지만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왜 날씨가 이렇게 더워지고 있는가, 지구가 계속 뜨겁게 달궈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따분한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를 멋지게 벗어던진 앨 고어 ‘교수님’이 때론 재미있게, 때론 엄숙하게, 때론 약간 지루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를 이대로 방치할 경우 과학자들이 예상하는 결과는 섬뜩하게 엄청나다. 남북극의 빙하가 다 녹아내리면 해수면은 35피트 높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해수면이 지금보다 5피트만 높아지면 플로리다는 물에 잠기게 된다. 뉴욕의 맨하탄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수십년내 그 발생 확률이 알카에다가 신발폭탄을 신고 항공기에 잠입할 확률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지난해 뉴올리언스를 수장시킨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날씨가 핵 못지않은 대량살상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강도와 빈도가 계속 올라가는 홍수와 토네이도, 산불과 가뭄은 물론이고 이상고온의 영향은 이미 우리들의 일상에도 스며들고 있다. 잡초가 무성해진 뒷마당에 부쩍 늘어난 모기, 고층빌딩 사무실까지 침범한 개미떼…홍수 발생지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지역의 주택보험료가 두배로 오르고 시에라네바다의 적설량이 줄어들면서 남가주엔 급수사정 악화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들의 가슴에 낭만으로 남아있던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산정’도 15년안에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한다. 소설가 오정희는 실종되는 계절에 대해 이렇게 한탄한다. “이러다보면 봄은 실체를 알 수 없이 다만 풍경의 기억과 이미지로만 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세상을 사는 우리가 오래전 멸종되어 사라진 공룡과 도도새에 대해 그러하듯…” 겨울과 봄은 없이 뜨거운 여름만 계속되는 지구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솔직히 지구온난화는 우리 일상 문제의 우선순위 리스트엔 들어있지도 않다. 내 집이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산불에 타지않는 한 대부분의 우리에겐 매달 집값 페이먼트가 훨씬 더 급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위기감을 못 느낀다’는데 있다. 개인뿐이 아니다. 정부도 못 느낀다. 안 느낀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시급하다고 비명을 질러도 지구온난화가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뜨거운 물속에 집어넣으면 뛰쳐나오는 개구리가 서서히 덥혀지는 물속에선 뜨거운 줄도 모르고 죽어간다. 이 같은 개구리 현상이 개인들의 불감증 원인이라면 정부의 외면 원인은 좀 더 복합적이다. 온난화 대책이 정치적·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든 원인이 규명되면 책임소재가 확실해진다. 그래서 온난화현상 자체에는 동의해도 그 원인에 대해선 의견을 달리한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지목한 주범은 산업화과정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다. 석유시추로부터 가정의 에어컨에 이르기까지 에너지를 사용하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그 배출양이 많아지면 지구표면에 두터운 온실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올라간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인재’가 아닌 자연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우리의 ‘고어 교수님’은 진실을 인정하기가 불편한 석유회사등 에너지업계가 지구온난화를 ‘사실’ 아닌 ‘논쟁’으로 몰고가려는 책략이라고 갈파한다.
부시행정부의 시각은 다르다. 지구온난화 과학이 너무 불확실하다며 이산화탄소 배출 산업에 대한 강력한 법적제재를 거부하고 있다. 환경보호그룹과 백악관의 이 의견대립은 결국 다음 회기에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산화탄소가 공기정화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할 공해인가 아닌가, 다시 말해 ‘법적 공해’의 기준을 가리게 된 것이다.
평균 미국인은 매년 1만5천 파운드의 이산화탄소를 대기중에 방출시킨다. 서유럽인의 두배다. 유럽에선 제재가 심하기 때문이다. 런던의 운전자들은 교통체증 부과금을 내고 노르웨이의 에너지 기업은 자기회사가 방출하는 이산화탄소를 해저 아래로 가두지 않으면 엄청난 세금을 감수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세금부과란 뜻인데 아직은 부시만이 아니라 고어조차 언급하기는 꺼리는 대책이다.
지구온난화를 치명적인 위험이라고 지적한 하버드대학의 대니얼 길버트교수는 “우리는 자명종도 없이 불타는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셈이다”라고 경고한다. 너무 늦지않게 깨어나고 싶다면 우리도 ‘불편’을 감수하며 조금씩 힘을 보태야 한다. 형광등으로 전구를 바꾸고 여름엔 에어컨을 2도 올리고 겨울엔 히터를 2도 낮추며…아 참, 2008년 대선에서 앨 고어를 찍는 것도 지구를 위하는 길일까. 그건 아직 2년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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