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만화가 김수정
진주의 가난한 소년 김수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시장통에서 비닐우산이나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계를 돕는다. 하지만 그에겐 만화가라는 꿈이 있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가출까지 감행한 그. 하지만 서른이 될 때까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역시 안 되는구나’ 고개를 떨어뜨리기 수십 번. 그랬던 그가 어떻게 둘리를 만들었을까? 둘리 아빠 김수정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만화가 김수정
- 6남 5녀 중 여덟째시라고요?
네. 어머니가 힘닿는 데까지 나으신 것 같아요.(웃음) 당시만 해도 보통 7, 8명은 다반사로 낳았어요. 그래도 11명은 조금 드문 경우이긴 했지만요. 우리 부모님이 노력을 좀 더 하신 편이었죠.
- 형제가 다 모이면 시끌벅적하겠어요.
지금 다 모이면 40명이 넘어요. 제례를 드릴 때 두 줄로 설 정도니까요.
- 형제가 많아서 좋았던 점과 나빴던 점은?
아무래도 어렸을 때 의식주 부분이 힘들었어요. 집이 좁다보니 형제들이 지그재그로 잤고, 이불 쟁탈전도 말할 수 없었죠.
- 어렸을 때 진주시장에서 비닐우산과 아이스크림을 파셨다고요?
잠깐 그런 적이 있어요. 중2 때 아버지가 작고하셨는데 제 밑으로 동생들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어머니 혼자 살림을 꾸려 가시는 게 보기 안쓰러웠어요.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 만화가가 된 계기는?
6~7살 때 만화를 처음 접했는데 그때 이미 만화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 만화와 관련된 걸 좋아했고, 만화를 그렸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꿈이 영글어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중3 때 서울로 무단상경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 오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저도 만화가로 성공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죠.
- 서울의 첫 인상은 어땠나요?
야반도주해서 기차를 타고 새벽에 용산역에 내렸어요. 시골 촌놈이 대도시에 처음 온 건데, 서울이 너무 무섭고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를 만나서 문하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보가 미흡했어요. 주소만 가지고 작가 선생님을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죠. 그래서 혼자 남산 주변을 헤매고 다니면서 노숙을 한 적도 있어요. 그때가 2월 하순경이라 너무 추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근데 그때 처음으로 새벽녘에 남산에서 서울을 바라보는데 안개 속에서 보는 서울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한 폭의 유화를 보는 것 같았어요. 은은하면서 집집마다 유화의 물감을 찍어 바른 듯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리고 남산을 내려와서 청계천으로 갔는데요. 청계천 다리 아래에 넝마주이들이 있더라고요. 그분들을 보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그분들과 합류할까 하다가 용기가 없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 그 후 언제 다시 서울로 갔나요?
당시만 해도 미대가 많지 않았고, 또 진주 지역에서 갈 수 있는 대학이 뻔 하잖아요. 그래서 경상대에 입학한 뒤 군대에 갔어요. 그리고 제대한 다음 복학하지 않고 만화에 대한 꿈을 계속 꾸고 있었죠. 근데 제가 입대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차트에 그림을 그리는 도안사 일을 했는데 수입이 꽤 좋았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반대가 많았어요. 군대 가기 전에 그런 좋은 직장도 있었으니 앞으로 그쪽 일을 하면 탄탄대로일 텐데 왜 굳이 만화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거였죠. 그리고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안 좋았고요. 하지만 저는 작가가 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하지만 서울에 와서도 문하생으로 못 들어갔죠.
- 강철수 작가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제대한 후 만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물론 전에도 만화를 그리긴 했지만 이제는 출판할 수 있을 정도로 프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그렸어요. 그렇게 그린 작품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해서 출판사에 갔는데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어요. 그때 출판사 편집자가 이런 정도로는 어려우니까 작가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련을 받는 게 좋겠다면서 강철수 선생님을 추천해 주더라고요.
당시 강철수 선생님은 고우영 선생님과 쌍벽을 이루며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어요. 그래서 강철수 선생을 찾아갔는데 또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그때 선생님이 내가 어지간한 애들은 안 만나주는데 네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 만나준 거니 영광으로 알아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원고를 보시더니 스토리 60점, 그림 40점이라고 하시고는 자기도 만화가가 되기 위해 친구들 두 명과 함께 서울에 왔는데 만화가로 성공한 사람은 나 혼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힘들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어지간하면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문하는 적어도 17~18살에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 배워서 언제 작가로 나서겠느냐는 거였죠. 당시 저는 25살이었거든요. 그렇게 하루에 두 번 거절을 당하다보니 앞이 안 보이더라고요.
- 가난 때문에 결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1남4여 막순이’라는 작품이 태어났다고요?
작가로 데뷔하고 5~6년이 지났지만 어떤 가능성이 보인다거나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귀던 여자분 쪽 집안의 반대로 인해 헤어지게 됐어요. 하지만 그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서 그분을 만나러 부산으로 찾아갔어요. 근데 만화를 그만두지 않으면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여자분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로서도 속상하고 섭섭했죠. 저는 평생 만화에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이렇게 쉽게 단죄한다는 것도 야속했죠.
그래서 ‘나로서는 만화를 버릴 수 없으니 당신이 그 결정에 대해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돌아섰어요. 그러고 나서 부산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분하고 야속해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만화 일 자체도 힘들고, 제 주변이 모두 나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을 못 잤죠. 그날 밤 떠오른 게 ‘1남4여 막순이’였어요. 그 작품 전까지만 해도 딱히 나의 그림 스타일이라는 게 정해지지 않았는데, 그날 밤에 내가 가야 할 만화의 큰 틀이 잡힌 거예요. 막순이가 나오면서 오달자의 봄이 나오고, 둘리가 나오고, 고도리가 나왔어요. 막순이가 하나의 시작점이 된 거죠.
- 젊은 나이에 너무 힘드셨겠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들보다 일찍 생활 전선에 나왔고, 또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성공이란 건 없나보다’라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하지만 만화만이 나의 존재,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끈을 이어줬어요. 만화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저 이 사회에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환경만 돼도 좋겠다는 게 당시로서는 최고의 꿈이었어요.
그리고 만화를 보는 사회적 인식도 너무나 열악했어요. 어른들이 만화방 가는 아이들 혼내는 건 그나마 양반이에요. 청소년의 달인 5월만 되면 종로 한복판에서 경찰과 검찰이 합동으로 수거했던 만화책을 불로 태우기도 했어요. 그리고 만화를 그리면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건 심의가 아니라 도덕 교과서를 만들라는 수준이었어요. 만화가도 작가인데 작가가 자기 본연의 무언가를 하지 못 한다는 건 아예 하지 말라는 소리거든요. 그런 상황들과 내부적 문제로 인해 굉장히 힘들었죠.
- 필화 사건도 겪으셨죠?
당시엔 잡지에서 연재하는 작가들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어요. 막순이는 단행본으로 만들어졌는데, 단행본으로는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잡지 쪽으로 가기 위해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8개월 동안 잡지에 맞는 만화 샘플을 그렸어요. 그러면서 어렵게 ‘아담과 이브’라는 만화를 주간중앙과 월간지에 연재하게 됐는데 반응이 좋은 거예요. 근데 어느 날 느닷없이 편집장에게서 호출이 왔어요. 혹시 누가 집에 안 왔냐는 거예요. 당시 제가 도봉동에 살았는데요. 그때만 해도 도봉동은 시골이었고, 저희 집엔 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못 찾아왔어요. 근데 주간중앙 편집부는 뒤집어진 거예요.
당시 만화 주인공인 아담의 머리가 덥수룩했는데요. 새로운 뭔가를 보여준다면서 이발사가 머리를 다 뽑아버리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 장면은 이주일 씨 개그의 패러디였어요. 근데 머리를 뽑고 나니까 그 모습이 국보위(국가안전보장위원회)의 누군가를 너무 닮은 거예요. 그때만 해도 신군부가 들어서기 전이었는데요. 국보위에서는 ‘왜 이런 게 누설됐나, 사전에 정보가 흘러간 것 아닌가’라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때 그분은 이미 야망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주간중앙이 완전히 뒤집어졌고, 중앙 일간지에 사과문도 냈어요. 그러고 나서 저는 잘렸죠.
그 만화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아서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역시 나란 인간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 만화를 본 여학생지 편집장이 저에게 여고생 이야기를 만화로 그릴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무명시절을 워낙 오래 겪었기 때문에 이미 작업해둔 게 많았어요. 만화를 하고 싶은데도 할 데가 없으니까 터져 나오는 욕구들을 나름대로 메모하거나 준비해뒀던 거죠. 그래서 그 다음 달부터 바로 연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오달자의 봄’이예요. 그 작품을 통해 비로소 김수정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오달자의 봄’은 전영록 씨와 이미영 씨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고요.
- 둘리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심의를 피해 갈까’를 연구했어요. 당시의 심의 기준은 도덕 교과서였어요. 아이들이 건방져도 안 되고, 비교육적인 언사를 해도 안 되고, 성인군자를 그려야 한다는 개념이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하는 아이들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아이는 아이다워야 아이인 거예요. 실패도 하고, 실패를 통해 나름대로의 자기 성찰을 해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심의를 피할 방법을 연구하다보니까 동물이 떠오르더라고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의인화하면 심의가 좀 완화되거든요. 그리고 이왕 동물을 주인공으로 할 거라면 개나 고양이처럼 흔한 게 아닌 걸 생각하다보니 공룡까지 가게 됐죠.
- 둘리도 주민등록번호가 있죠?
네. 부천에서 주민등록을 받았어요. 부천시가 문화도시를 꿈꾸면서 ‘둘리의 거리’를 만들었는데, 자연스럽게 그곳이 둘리의 주소지가 됐어요.
- YWCA 주부들이 둘리를 불량만화로 규정한 적이 있었죠?
YWCA에 어머니 만화 모니터 모임이 있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만화의 폐해에서 보호하자는 단체였는데요. 어머니들이 둘리에 대해 굉장히 심각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비교육적이라는 거예요. 어른은 너무 폭력적이고, 아이들은 너무 건방지고 되바라지고 예의를 모른다는 거예요. 길동이를 ‘길동아~’라고 부르고, 한술 더 떠서 약간 음란성이 있다는 거예요. 희동이가 목욕을 하고 뛰어다니는 장면에서 고추를 그렸는데, 심의에서 그걸 지워달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꼬투리를 잡기 위한 꼬투리였던 것 같아요.
- 처음으로 ‘내가 성공했구나’라고 느낀 적은?
어느 날 갑자기 성공을 느낀 건 아니었어요. 오달자를 통해, 고도리를 통해, 둘리를 통해 물이 스며들듯 조금씩 찾아왔죠. 그러다가 정말 실감했던 건 둘리를 연재하고 1년 반이 지나서 교보문고에서 사인회를 한 적이 있는데, 2시에 시작해서 7시까지 했어요. 사람들의 줄이 지하도 밖으로 나와 버려서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죠. 원래는 2시간 정도로 예정을 잡았는데 5시간 이상 하게 됐죠. 그 때 처음으로 둘리의 힘을 느꼈어요.
- 김수정 만화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사람들과 즐거움, 유쾌함을 공유하고 싶어요. 철학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하다고 할 지 모르겠는데요.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만화를 통한 웃음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웃음 이면에는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도사리고 있지만 어쨌든 유쾌함을 많이 주고 싶어요.
▶진행: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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