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에선 4월 아닌 6월이 ‘잔인한 달’이다. 1년중 가장 바쁜 계절이다. 7월부터 3개월간의 긴 휴무에 들어가기 전 남은 숙제를 모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10월 첫 월요일부터 6월말까지 9개월동안 연방대법원이 결정하는 케이스 1백여건 중 3분의 1이 수험생 벼락공부하듯 6월에 처리되니 ‘잠 못이루는 6월의 밤’이라는 대법원 안팎의 하소연도 과장만은 아닐듯 싶다.
11년만에 멤버교체를 이룬 금년회기 대법원이 느끼는 압박감은 더 심하다. 6월에 들어서며 신임 대법원장 존 로버츠가 이렇게 농담을 건넸을 정도다. “요즘은 마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뛰어내려 50층쯤 지나며 ‘아직은 괜찮아요’라고 소리치는 사람같은 심정입니다” 가장 힘든 상황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로버츠와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등 보수파 새 멤버들이 입성한 대법원이 예상대로 강경보수 성향으로 바뀌었는가를 단언하기는 아직 이르다. 대체로 보수적인듯 싶긴 한데 일부 판결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지난주 나온 직장내 차별관련 판결이다. 한인 고용주들도 유의해야할 케이스다.
고용주가 성차별에 항의한 종업원을 타당한 이유없이 다른 부서로 전출시키면 ‘보복’에 해당된다는 판결이다. 보복조치는 물론 위법행위다.
고용주건 종업원이건 직장내 온갖 차별금지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종업원들이 항의했다간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면 금지법은 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미국의 고용차별금지 연방법은 제정 당시부터 고용주의 보복도 위법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그러나 ‘보복’의 기준은 분명치 않았다. 어느 선까지의 조치가 불법 보복인가. 법원 따라, 주 따라 해석이 분분했었던 이슈를 대법원이 지난주 판결로 매듭지었다. ‘보복’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다. 고용주의 보복이 위법으로 규정된 것은 1964년으로 이미 오래지만 대법원이 보복의 기준을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판결은 테네시주 한 철도회사 신입사원 쉐일라 화이트의 소송에서 나왔다. 경험을 인정받아 포크리프트 운전자로 일하게 된 화이트는 남성만 근무해온 이 부서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성차별 분위기가 완연했다. 특히 직속 수퍼바이저의 성희롱과 차별은 견디기 힘들었다. 화이트는 회사에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인 고용주들이 유의해야할 부분은 여기부터다. 회사도 조치를 취했다. 수퍼바이저에게 10일간의 무급정직 처분을 내렸다. 동시에 화이트의 자리도 바꿨다. 선로보수 업무로 포크리프트 운전보다는 고되었지만 봉급은 같았다(대부분 이정도면 상당히 ‘fair’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후 화이트가 새 부서의 상관과 충돌을 일으키자 회사는 37일간의 무급정직 처분을 내렸다가 노조등의 중재로 정직을 풀고 봉급도 전액 소급 지불했다.
‘직장업무의 사소한 변경을 위법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회사측 변호사의 반박을 대법원은 일축하며 보복의 기준을 이렇게 정의했다. “고용주가 내린 조처를 보고 ‘합리적’ 사고를 가진 다른 종업원이 비슷한 차별을 당했을 때 항의를 단념한다면 그것이 바로 보복이다”
이번 판결문을 작성한 중도보수 성향의 스티븐 브레어 대법관은 또 해당 종업원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고용주의 같은 조처가 보복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근무시간 변경은 일반 종업원에겐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젊은 엄마에겐 보복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별을 항의했던 종업원에게만 점심을 안 사주는 것은 별 문제없어도 만약 그 점심이 회의나 연수를 겸한 회식이라면 보복조치에 해당된다. 해고나 강등 같은 직접 보복 뿐 아니라 근무시간 변경, 훈련 연수 제외 등 간접적 조치도 위법행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차별과 보복의 이중고를 견디어야했던 힘없는 종업원들의 승리라고 진보그룹에선 환영하고, 부시행정부를 포함한 친기업 보수그룹에선 특히 소기업 고용주를 괴롭히는 소송이 사태를 이룰 것이라며 불만을 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판결은 9대0 만장일치였다.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는 대법원인데…예상 밖이다.
연방대법원의 2005-2006 회기는 오늘로 막을 내린다. 관타나모 수용소 포로들을 군사재판에 회부시키려는 부시대통령 권한의 합헌성에 대한 판결이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것이다. 로버츠대법원의 이념 성향에 대한 진짜 테스트는 다음 회기다. 낙태와 어퍼머티브 액션, 환경보호 등의 이념색깔 짙은 케이스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임이후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내용의 제한성과 만장일치의 합의를 강조하며 사법부의 이념논쟁을 견제해왔다. 대법관은 사회운동가가 아니라고 강조도 한다. 그의 이런 신념이 충실히 실천에 옮겨진다면 ‘로버츠 대법원’은 마이너리티인 우리가 기대어도 좋은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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