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란인이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사연을 띄웠다.
“월드컵은 나 같은 이란인들이 세계를 향해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외로운 국민입니다. 국내에선 압제에 시달리고 해외언론들에겐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우리가 월드컵을 통해 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세계가 우리를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월드컵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뉴욕타임스 월드컵 블로그가 뽑은 ‘톱10 순간들’중 맨 처음에 오른 스토리다. 전세계 축구팬들이 2006월드컵 첫 열흘간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한 순간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이란의 월드컵 진출을 막으려는 움직임은 핵무기 개발로 눈총을 받고 있는 이란의 대통령이 경기를 참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때 활발해졌었다. ‘나치의 유대인학살은 날조된 것, 이스라엘은 사라져야할 나라’등의 막말로 세계적 파문을 일으킨 그가 ‘핵과학자들처럼 축구팀도 이란에 영광을 안겨줄 것’이라고 격려하자 ‘우린 정치와 상관없다’고 펄쩍 뛴 것은 오히려 이란 선수단이었다.
‘축구와 정치’ 해프닝은 전에도 있었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예선 조추첨 행사에 참석하려던 나이지리아 대표단에게 프랑스정부가 입국비자를 거부했다. 당시 나이지리아정부가 민주화 인사들을 불법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은 정치와 축구를 혼동말라며 루브르박물관에서 거행할 조추첨행사를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프랑스는 비자를 발급했다.
이번에도 유럽위원회를 중심으로한 이란 퇴출 추진을 FIFA는 일언지하로 거부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란의 16강 탈락으로 대통령의 독일행도 무산되었으나 이란에서 온 편지에 대한 지지반응은 뜨거웠다. 월드컵이 정치나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란 것을 증명한 것이다. ‘친구를 만들 시간(a time to make friends)’ - 독일월드컵의 공식 슬로건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순간’은 아프리카의 자부심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자국팀 경기외에 각국 언론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단연 아프리카다. 아프리카의 매력은 90년대 이후 매번 월드컵 때마다 어김없이 보여준 ‘이변’에 있다. 특히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카메룬과 2002년 서울월드컵 개막전에서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를 제패한 세네갈의 검은 돌풍은 아직도 축구팬들을 즐겁게 하는 신화로 남아있다.
이번엔 초반부터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5개국이 출전했으나 벌써 3개국은 짐을 싸는 신세다. 스타가 탄생한 것은 지난 주말, 마침내 ‘검은 별’ 가나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랭킹2위의 체코를 2대0으로 제압한 것이다. 랭킹48위에 월드컵 처녀출전이긴 하지만 사실 가나의 축구역사는 상당히 깊다. 19세기 영국상인들이 전래한 이후 축구는 가나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왔다. 아프리카 우승컵도 4번이나 차지했다. 역사도 깊고 개인기도 뛰어나고 아프리카에선 펄펄 나는 가나의 축구가 월드컵엔 한번도 진출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미스테리로 꼽혀왔을 정도다.
가나의 16강 진출은 오늘 경기에 달려있다. 자신들이 미국을 이기고 이탈리아가 체코를 눌러주어야만 진짜 이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가나에선 이미 22일이 반공휴일로 선포되었다. 모든 국민이 44년을 기다려온 이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기위해 일손을 멈추는 것이다.
예상에 빗나간 결과가 드물어 싱겁다는 금년이지만 월드컵 역사에 기록될 ‘멋진 순간’도 이미 등장했다. 16일 아르헨티나와 세르비아의 경기를 중계하던 유니비전의 해설가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 탱고리듬에 맞추어 패스를 하고 있습니다” 6대0으로 대승한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골은 글자 그대로 ‘아트사커’의 본보기였다. 사비올라에서 리켈메로, 다시 사비올라에서 캄비아소로, 크레스포로, 다시 캄비아소로…57초동안 26번의 정확한 패스끝에 골로 이어진 ‘환상적인 플레이’ - 월드컵 사상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하나였다.
우리에겐 절대적인 ‘넘버원의 순간들’ 박지성과 안정환의 눈부신 골을 포함시키지 않은채 뉴욕타임스는 그밖에도 영국의 키다리 피터 크라우치의 헤딩골, 폴랜드 누른 에콰도르, 트리니다드의 용감한 전사들 등을 톱10 순간들로 꼽으며 2006 월드컵의 전반부를 대충 마무리하고 있다.
조별리그는 이제 8경기만을 남겨놓고 있다. 10개팀은 이미 16강 진출이 확정됐고 9개팀은 탈락했다. 한국을 포함한 나머지 13개팀에겐 오늘과 내일이 생사를 가르는 가장 뜨거운 날이다. 경우의 수 따위는 필요없이 ‘무조건 이기겠다’고 다짐해준 박지성을 믿는다면 스위스를 넘어 조1위로 16강 진출을 이룰 수 있다. 그때는 한국도 세계의 축구팬들이 꼽는 톱10 순간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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