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누군지 인생을 깊게 본 사람이다.” 이와 동시에 테니스볼이 네트에 걸렸다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쪽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시합의 운명이, 선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할리웃의 전설 우디 앨런의 최근작 ‘매치 포인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테니스 선수였던 주인공은 부자 집 아들에게 레슨을 해주다 친해져 그의 누이동생과 사귀게 되고 결국은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부자 집 아들의 약혼녀에 눈이 멀어 임신까지 시킨다. 아내 덕에 얻은 좋은 집과 직장,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강도를 위장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훔친 물건을 모두 없앤 후 마지막으로 반지를 템스 강에 던진다. 안심하고 돌아서는 순간 반지는 난간에 맞고 길가에 떨어지고 그것으로 주인공의 운명도 바뀐다. 평범한 스토리지만 이걸 처음부터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는 것은 역시 감독의 솜씨다. 인생에서 운과 실력, 어느 쪽이 정말 중요한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중국 속담에 ‘호리가 천리 된다’는 말이 있다. 처음 실낱같은 차이가 나중에 엄청난 격차를 초래한다는 이 말의 진리를 보여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던진 돌팔매가 골리앗의 이마를 1인치만 비켜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다윗은 골리앗의 칼에 죽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이란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영화는 물론 유대교 자체도 아마 존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대교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회교 또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회교가 없었다면 십자군 원정도 9/11 테러도 없었을 것이다. 돌팔매 하나가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은 셈이다.
64년 전 6월 미드웨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41년 12월 펄 하버에서 기습을 당한 미 해군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반면 일본 제1함대는 태평양 전역을 안방 삼아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1942년 6월 4일 아침 미 함대는 수적 열세 속에 결사 항전을 벌였으나 출격한 전투기와 폭격기의 90%를 잃었다.
오전 10시 30분 미국의 마지막 공격대였던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수십 대가 운 좋게 아카기, 가가, 소류 등 세 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발견했다. 때 마침 항모 갑판 위는 폭탄을 갈아 끼우고 급유를 하느라 발화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작스런 미군의 공격을 받은 세 척의 항모는 손쓸 새도 없이 불길에 휩싸였고 곧 가라앉았다. 불과 5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은 한 척의 항공모함 히류 또한 수 시간 후 폭격을 받고 침몰, 일본 제1함대는 하루만에 궤멸됐다. 그 후 일본은 단 한번도 태평양의 제해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만약 이날 마지막 미 전투기까지 격추 당했더라면, 돈트리스 부대가 일본 항모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 순간 갑판 위가 깨끗했더라면,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면 태평양전쟁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며 한국은 아직도 일본 식민지로 남고 6/25도 없었을지 모른다.
18일 열린 한국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기적적인 무승부’를 기록했다. 여기서 기적적이라는 얘기는 정말 멋진 골을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질 것 같은 경기였는데 간신히 비겼다는 뜻이다. 이날 한국은 처음 80분 동안 슈팅다운 슈팅 하나 날리지 못하고 졸전을 펼치다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박지성이 골키퍼 손을 살짝 넘겨 골포스트 안쪽으로 가까스로 차 넣은 공이 들어가면서 겨우 비겼다.
만약 이 공이 골키퍼 손에 맞았더라면, 몇 인치만 빗나갔더라면, 잠을 안자고 응원한 수백만 한국민의 환호는 분노로 바뀌고 맥없는 경기를 펼친 선수들과 감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성이 찬 공은 골키퍼 손을 넘기고 골대 안으로 아슬아슬 하게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박지성은 국민의 영웅이 되고 한국민은 열광했으며 다시 23일 스위스와의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볼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자신의 손끝 하나에 울고 웃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인간은 정녕 운명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가.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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