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보는 재미는 여러 가지다. 우선은 안정환의 역전골에 열광하는 뜨거운 기쁨이다. 요즘 급증한 ‘축구전문가’들은 세계적 선수들의 눈부신 묘기 관전을 꼽는다(그러나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엇이 그토록 절묘했는지 조차 모르는 문외한도 상당수다). 세번째는 내편 네편 상관없이 문외한도, 전문가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감동이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그라운드의 이변, 크고작은 ‘기적’들이 매 월드컵역사마다 기록되기 때문이다.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이 며칠전 설문조사를 했다. ‘지금까지 어느 팀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까’
워싱턴포스트 월드컵 특파원의 블로그엔 독자의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현지에서 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팀은 어딥니까’
두 질문에 대답이 같았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입니다’
포스트 특파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 주말 스웨덴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후 인기가 치솟았지요. 자국팀이 출전못한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응원단 ‘타탄 군단’이 트리니다드팀을 입양했다고 합니다. 특히 15일 영국과의 경기에서 대대적인 응원을 벼르고 있습니다”
북중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인구가 겨우 130만, 역대 월드컵 출전국 중 가장 작은 나라다. 천신만고의 예선을 거쳐 처녀 출전해 2006 월드컵의 최약체로 꼽힌다. 반면 ‘바이킹 군단’ 스웨덴은 11번이나 본선에 진출해온 북유럽의 강호다. 유럽의 명문리그에서 활약중인 스타 플레이어들이 대거 포진해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FIFA랭킹 15위 팀이다.
모든 전문가가 스웨덴의 압승을 점친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실제 경기내용도 스웨덴이 압도적으로 우세였다. 그러나 무승부였다. 그것도 0대0, 공격 점유율 74%, 볼 점유율 60%를 기록하면서도 스웨덴은 트리니다드의 골망을 단 한번도 흔들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후반 1분만에 트리니다드의 수비수가 반칙으로 퇴장당하며 더욱 열세로 빠졌지만 10명의 ‘소카 전사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경기장 한가운데서 제2의 감독 역할을 한 35세의 주장 드와이트 요크의 리드에 따라 강한 정신력과 뛰어난 조직력을 끝까지 잃지 않고 뛰었다. 자신들의 슬로건 ‘카리브해의 투혼이 온다’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장과 신예들이 마음과 몸을 합해 필사의 수비를 펼쳐 나갔다. 스웨덴 스타들의 화려한 묘기를 관전하려고 TV앞에 앉았던 세계의 축구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트리니다드의 응원단으로 변해있었다.
마지막 경기종료의 휘슬이 울렸을 때, 트리니다드의 선수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골키퍼 샤카 히즐롭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은 울고 웃으며 서로를 얼싸 안았고 6만여 관중들은 ‘히즐롭’을 연호하며 기립박수로 이들을 향해 최대의 존경을 표했다.
경기의 최우수 선수엔 요크가 뽑혔지만 각 미디어가 이날의 영웅으로 전세계에 타전한 것은 히즐롭이었다. 37세의 히즐롭은 주전도 아니었다.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투입된 대타였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해온 선수였지만 나이 들며 자국에서도 2진으로 밀린 노장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히즐롭은 팀마다 방출하려는 한물 간 후보선수가 아니었다. 스웨덴 최강 공격수들의 거센 슈팅을 온몸으로 막아낸 그의 신들린 선방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선수들과 팬들을 동시에 감동시켰으며 “우린 도저히 공을 차 넣을 수가 없었다”는 상대 선수들의 경의까지 얻어냈다. 이날 그가 막아낸 슛은 무려 18개였다.
스웨덴에게는 패배만큼 뼈아픈 무승부였으나 트리니다드에겐 우승 못지않게 뜻 깊은 사실상의 승리였다. 월드컵 첫 출전 첫 경기에서 승점 1점을 따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지와 자국에서 이 섬나라의 선수들과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아무도 승률을 점쳐주지 않았던 나라다. 승률은 커녕 꼴찌 예상후보로 자주 거론되어왔다. 세계의 베팅 업체들이 우승후보 1위 브라질에게 준 우승배당률은 3.75대1이다. 트리니다드는 기록적인 1001대1, 물론 32개국 중 꼴찌다. 그러나 34대1을 받은 스웨덴과 실제경기에선 비겼다. 오늘은 9대1을 받은 영국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기적’을 이룬 팀들이 모두 그렇듯이 트리니다드팀에도 선수들의 절대적 존경과 신뢰를 받는 감독이 있다. 히딩크처럼 네델란드 출신의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축구에선 어떤 일도 가능하다. 다음 경기엔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러나 축구는 수학이 아니다. 축구에선 2+2=4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3 아니면 5가 된다”
우승배당률 150대1인 우리가 앞으로 싸워야할 프랑스는 12대1이고 스웨덴도 100대1이다. ‘축구는 수학이 아니다’ - 베인하커르 감독의 말이 마음에 든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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