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머니는 보고픈데 안온다고 울고
미국 둘째딸은 보고파도 못간다고 울고
관광비자 취업비자, 체류기한, 불법체류 합법체류, 단속 도망 체포 추방…. 2001년 4월, 돈 몇푼 쥐고 가방 두어개 들고 김포공항을 떠난, 마흔다섯이 되도록 외국땅 한번 밟아보지 못한 박영순(가명•여•50•알라메다 거주) 씨가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어렴풋이 들은 것도 같지만 굳이 꼬치꼬치 알아야 할 까닭이 없었다. 일단 오면 길이 있다, 살다보면 길이 생긴다, 일자리 많겠다, 애들 스트레스 안받고 학교다닐 수 있겠다, 아무 생각 말고 어서 와라. 언니 친구의 말은 곧 복음이었다.
그래, 가자, 덤벼보자. 까짓것, 이 체면 저 눈총 다 제쳐놓고 수삼년 김밥도 말았는데, 언니 친구 말고는 아는 사람 없는 미국에서 무슨 일인들 못하랴. 박 씨는 그때까지 서울 갈월동에서 친정 부모와 함께 분식점을 했다. 여대생 귀한 70년대 후반 직물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후 짱짱한 섬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같은 계통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딸 낳고 아들을 봐 200점짜리 엄마 소리를 들으며 단란한 가정을 일구던 박 씨가 친정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 30대 중반 시작된 별거, 세상사람 입방아 밑천이기 십상인 친정살이는 10년이나 지속됐다. 그 사이 호구지책이 먹거리장사였다. 이혼장에 도장을 찍은 건 미국행 결심을 굳힌 뒤였다.
<하숙생>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6개월 체류를 허가받은 관광객신분 박 씨는 이스트베이 어디서 팔자에 없는 중년의 하숙생이 됐다. 여름방학이 되면 뒤따라올 딸아들을 기다리며 물정도 익혀놓고 그때까지 한푼이라도 아끼자는 것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일을 하세요. 일자리는 내가 알아봐줄테니.” 하숙집 주인 소개로 곧 코리아나플라자에서 잠시 손놓은 김밥말이 일을 다시 시작했다. 많지는 않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일자리가 있다는 게 고마웠다. 두달쯤 뒤 자녀들과의 재회를 앞두고는 알라메다의 방 두칸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모든 것은 술술 풀려갔다. 신분? 아직 넉달이나 남았는데 뭘, 세상일이야 하루아침에도 바뀔 수 있는데 뭘.
<9•11>
하루아침도 아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을 바꿔버린 일은 정말로 일어났다. 9월11일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미국을, 세계를 강타한 테러참사-. 다만, 그것이 바꿔놓은 세상이 박 씨의 막연한 희망과 정반대였을 뿐. 모든 것이 싸늘해졌다. 이내 얼어붙었다. 느릿느릿 걷던 체류기한도 줄달음을 쳐 금새 불체자가 됐다.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걸리면 쫓겨난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그제서야 박 씨는 불체의 올가미를 또렷하게 알아차렸다. 차라리 모를 때가 낳았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제는 어쩌다 가게에 들르는 경찰만 봐도 눈은 슬금슬금 피하고 가슴은 콩당콩당 뛰었다. 운전 중 뒷거울에 경찰차가 비치면 손부터 파르르 떨렸다. 오금이 저려 엉뚱한 데로 새거나 길가에 세워놓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고를 내도 안되지만 혹시 당하더라도 제가 그냥 도망칠 것 같아요.”
<불체자>
노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있어봤자 저절로 길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물어물어 찾아다녔다. 번번이 깨졌다. “LA 000 변호사가 유명하다길래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안되면 연방상원에 뭘 내야된다나 그러면서 선금으로 5,000불을 내라고 해요. 사정사정 깎아서 우선 4,000불을 놓고왔는데 아직 감감소식이에요.” 3만불인가 4만불인가 주면 시민권자랑 가짜결혼을 주선해주겠다고 은근히 권한 사람도 있었다. 날린 거나 다름없는 LA 변호사비 4,000불도 실은 빚을 낸 것이었고 그 빚을 1년 넘도록 한푼도 못갚고 있는데다, 한달동안 죽어라 일해서 손에 쥐는 2,500불 가운데 렌트비 1,000불 떼고 남은 1,500불로 먹거리장만 옷가지장만 자녀용돈 유틸리티비용 등 세식구 살아남기도 빠듯한데, 그 뭉칫돈을 마련할 여유도 없으려니와 처지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가짜결혼까지 감행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안그래도 고르지 못한 이는 스트레스로 더욱 상해 일곱 대나 엇나가버렸다. 참다 참다 못해 누구 소개로 보험 없어도 된다는 아시안헬스센터를 몇번 찾아갔지만 그 비용도 보통 40,50불 비싸면 400,500불이나 돼 치료를 받는둥마는둥 했다. 9•11 전에 얼렁뚱땅 면허증이라도 따놓은 게 다행이었다. 딸은 없는 돈에 시애틀까지 가서 따와야 했다. 한 대뿐인 중고차는 딸에게 주고 박씨는 아침 8시쯤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세번째 직장 일식당으로 가 9시부터 밤8시까지 일한다. 집에 오면 밤 9시쯤. 오른쪽 다리는 쑤시고 저리더니 왼쪽다리의 1.5배는 돼보이게 퉁퉁 부었다.
<불효자>
말이 좋아 미국생활 어언 4년이 된 지난해 이맘때, 박 씨는 서울 아버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수시로 전화안부를 여쭤온 터였으므로 새삼스레 서울로 보내려는 게 아니었다. 가정의달 맞이 가족편지 캠페인을 실시한 본보 편집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물로 쓴 그 편지를 부쳐놓고 다시금 아버님 생각에 잠긴 그 다음달(5월27일), 아버님 타계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갈 수 없는 타국땅 딸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목놓아 우는 것밖에.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홀로 남은 어머님 생각에 목이 메이고 가슴이 미어졌다. 가끔 치매증세까지 보인다는 팔십다섯 어머님은 미국 간 내 딸이, 내 손주 내 손자가 보고싶은데 왜 그리 안오냐고 울고, 미국땅 딸은 보고싶어도 갈 수 없어서 울고.
<못난 엄마>
울 소재는 그것 말고도 수북했다. 딸은 고1때 영어고생은 심했지만 디자이너 엄마아빠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미술에서 일찌감치 소질을 보였다. 지난해에는 다들 부러워하는 동부의 예술전문 명문대 몇군데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기쁨은 잠시. 신분이 문제라며 학교측으로부터 속속 합격취소통보가 날아들었다. 딸은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부짖었다. 달래고 달래 딸의 울움이 멈추자 박 씨는 슬그머니 집을 나와 알라메다 해변으로 나갔다, 자식들 앞에서 어미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므로. 귀품 팔고 발품 팔아 LA 민족학교의 도움을 얻어 딸은 지금 인근 시티칼리지에 다니고 있다. 올해, 아니 바로 얼마전에는 아들 때문에 또 밤해변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와 멋모르고 자라다 고교생이 된 아들이 올해 여름방학에는 제 손으로 용돈을 벌겠다며 여기저기 아르바이트신청을 했는데 그것마저 신분 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듣고 어깨가 늘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5년, 그 세월을 버텨낸 박 씨에게 눈물의 샘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의 샘도 마르지 않았다. 예까지 견뎠는데 뭘 더 못견디랴 오기도 생긴다. 그리고 그 희망의 원천은 역시 사람이다. “000 사장님 은혜는 죽어도 못잊을 겁니다. 불체자라면 아무래도 좀 꺼리잖아요. 그런데 첨부터 일자리도 알아봐주시고, 여기(지금 일하는 일식당) 일자리도 맡겨주시고. 실은 작년에 그 LA 변호사한테 준 돈도 000 사장님이 군말 안하고 빌려주신 거에요. 아직 한푼도 못갚았는데 달라 말라 말씀 한번 없으세요. 그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박 씨의 낯이 비로소 펴지는 것 같았다. 박 씨가 고마워하는 또다른 사람들, 바로 그 일식당 젊은 사장 부부다. 불체자 단속이다 뭐다 해도 티 한번 내지 않고 누나처럼 언니처럼 대해주는 젊은 부부가 한편 고맙고 한편 부럽다. 그래서 늘 박 씨는 눈물 속에서 희망의 싹을 틔운다. <정태수 기자>
박 씨가 낯빛이 환해지며 그토록 고마워한 000 사장.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EB지역 여장부 사업가다. 남자들도 절절 맬 정도로 기가 센 그지만 아무나 업수이 여기기 쉬운 불체자들에게는 오히려 약하다. 못도와줘 안달이다. 이유가 있다. 80년대 초 미국땅을 밟은 이후 불체자 신분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해 길거리 가방장사, 플리마켓 뜨네기장사 등 안해본 것 없이 다 하며 자수성가한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불체자를 돕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운영하는 업소에서 일했거나 일하는 불체자는 헤아릴 수도 없고 그 업소 보증하에 영주권을 받아나간 사람만 해도 손가락이 모자란다. 그 덕분에 혹은 그 때문에, 예기치 않은 몹쓸일도 많이 당했다. 한인사회를 위해 10년을 봉사했네 어쩌네 하는 어느 단체 회장이란 사람은 000 사장과 돈 문제로 성가신 일이 생기자 은근슬쩍 불체자 고용 운운하며 신고할 듯이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000 사장의 불체자 돕기 위험한 모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태수 기자>
재미한인 불체자 약19만명
미국 내 한인 불체자는 몇명이나 될까. 공식통계는 없다. 그러나 LA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재미한인(2000년 센서스 기준 83만3,454명)의 17%에 해당하는 약19만명이 불체자다. 국가별 순위로는 14위. 또 이민수속 적체로 이산가족이 된 한인은 7만7,000여명으로 추산됐다. 한편 재미한인의 1세비중은 여전히 높아 무려 77.7%에 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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