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으로 알려진 클린턴보다야 못하겠지만 부시대통령도 틈만 나면 독서에 몰두한다. 예일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최근엔 이민관련서적, 그중에서도 1921년의 이민제한법에 관한 분석을 여러권 섭렵했다. “대통령은 당시 이민을 제한한 것이 1930년대 대공황의 한 원인이라고 믿어요. ‘우리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 무엇인가를 기억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라고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는 전한다.
독서의 힘일까. 부시가 달라졌다. 월요일 저녁 대국민 연설을 하는 부시는 확실히 종전의 ‘부시답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슈에서 늘 강한 어조로 보수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양극화 논쟁의 선두에 서왔던 그가 이례적으로 중도적 입장에 서서 화합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민 논쟁은 합리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태도로 해야 한다. 분노나 공포로 몰아가며 정치적 이해관계로 이민이슈를 다룬다면 우린 단합된 국가를 이룰 수 없다”고 전제한 그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자동사면’이나 ‘집단추방’은 양쪽 모두 비현실적 극단론이라고 지적하며 이성적인 중간지점을 찾자고 호소했다.
‘갑자기 웬 중립?’ ‘너무 어색한데…’등의 야유도 적지않고 배신감을 느낀 보수진영의 반발도 시끌시끌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변신은,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이민자들에겐 희망적 신호일 수도 있다.
이번 부시 연설의 하이라이트는 두가지다. 국경수비 강화를 위한 주방위군 투입과 불체자 신분합법화에 대한 공식지지다. 화려하게 뉴스의 조명을 받은 주방위군 투입이 강경보수 진영을 달래기위한 제스처였다면 불체자 신분합법화는 그의 진보적 이민철학을 조용히 공표한 것이다.
주방위군 투입은 상징적인 정책이다. 이민논쟁에서 여론이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대목이 국경수비다. 81%가 조속한 강화를 지지하고 74%가 방위군 투입을 찬성한다. 진보파 민주당 의원들도 국경강화는 반대하지 못한다. 국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 어제 상원도 국경장벽 설치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이번 부시의 방위군 투입에 대한 의회의 일부 회의적 반응도 반대라기보다는 우려다. 방위군의 빠듯한 인력실정이나 막대한 투입 비용에 비해 수비에 별 실효성이 없을 것 같아서다.
불법이민이 장벽이나 순찰로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론도, 의회도, 부시도 알고 있다. 1억6백만명 멕시코 인구 중 46%가 미국이민을 희망하며 21%가 필요하다면 불법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퓨 히스패닉센터의 조사결과다. 멕시코에서도 출산율이 저하중이어서 노동력 부족상태가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수십년 후다. 밀입국이 자연히 줄어들 그때까지는 불법이민을 막을 최선책은 합법이민을 늘이도록 법을 개정하는 길일 지 모른다.
부시가 기존 불체자의 신분합법화를 공식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복잡한 절차와 조건이 붙기는 하겠지만 ‘실제적 사면’이다. 겉으론 사면이 아니라고 펄쩍 뛰는 부시의 친화적 이민관은 사실 오래전부터 형성되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뉴스위크는 부시의 이민철학 정립에 영향을 준 요소로 세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이민역사 서적 탐독, 둘째는 인도주의를 외면한 유럽 이민정책의 실패, 그리고 국경지대인 텍사스 주지사로서의 경험이다.
텍사스주 미들랜드 초등학교 시절부터 히스패닉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온 그는 레인저스 구단주 시절에도 히스패닉 선수들과 스팽글리시로 농담하길 즐겼다. 반이민정서가 미전국을 휩쓸었던 1990년대 중반 그가 주지사로 재임했던 텍사스에는 (주지사가 반이민 주민발의안 187의 통과에 앞장섰던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불체자의 공공복지 삭감이 거론되지 않았다. “부시는 가난한 이민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공감했고 미국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이민의 힘이라고 늘 믿어왔다”고 텍사스의 측근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친화적 이민철학을 드러낸 부시의 변신에 보수진영은 냉담하다. 특히 반이민 개혁안을 이미 통과시켜놓은 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강경하다. 부시의 정치적 장악력이 약화되었다는 증거다. 지난해 말 하원 표결시 그가 앞장서 강하게 반대하며 통과를 막았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결국 공화당 대통령의 역사적 과제 실현에 공화당 의원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백악관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오늘부터 부시 자신도 애리조나주를 선두로 순회연설을 시작하고 아직 공화당 보수진영에 영향력이 상당한 체니부통령도 설득에 나선다. 백악관의 표현대로 ‘긴 대화의 시작’이다. 강경보수를 표방해온 부시의 백악관과 마음을 함께 하기 힘들었던 우리도 이번엔 이들의 캠페인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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