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방정부 소속 정보기관은 무려 16개나 된다. 잘 알려진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을 선두로 육·해·공군과 해병대, 해안경비대 등의 정보국이 제각각 있고 국토안보부와 국무부, 재무부, 에너지부도 자체 정보부서를 갖고 있다. 지난 연초 전국적 논란을 불렀던 부시의 ‘영장없는 도청’의 시행처인 국가안보국(NSA)도 빼놓을 수 없고 CIA, NSA와 함께 5대 정보기관으로 꼽히는 국방정보국, 국방정찰국, 국가영상지도국도 모두 명성이 쟁쟁하다. 이들에게 배정된 1년 예산이 440억달러에 이른다.
9.11테러는 이처럼 세계 최고·최대라는 미국의 정보체계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무자비할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연방의회의 9.11테러진상 위원회에서 밝혀진 내용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테러는 해외에서 음모가 꾸며진뒤 국내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CIA는 해외음모 포착에 실패했고 FBI는 국내 동향 파악에 실패했다” 정보수집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각 기관의 긴밀한 협조가 없어 대책마련을 위한 정보 분석에서 실패했다는 지적이 덧붙여졌다.
모든 정보기관이 아직까지 9.11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은 것은 CIA였다. 설상가상으로 테러 1년후 발표된 CIA의 이라크 무기관련 보고서는 의회가 부시의 이라크침공을 지지한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결국 허위로 판명된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였다. 이를 계기로 CIA의 위상추락은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조지 테닛국장이 사임했고 CIA는 시급히 개혁되어야할 거대 무능 조직의 표본쯤으로 눈총을 받았다.
(CIA 내부에선 지금도 ‘우리만 희생양이 되었다’며 억울하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테러발생 8개월전부터 백악관에 테러 가능성을 경고해왔으나 번번이 무시당했고 이라크 관련정보가 허위라는 것 역시 백악관에 누차 보고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4년 의회조사위는 정보기관 개혁안을 제시했다. 국가정보국장(NID)이라는 새 직책이 신설되었다. 연 10억달러 예산, 1,500백명의 스탭이 배당된 새로운 정보계 ‘실세’였다.
그런데 그의 임무가 종래 CIA국장의 일이었다. ‘세계 최고 정보조직’의 명성을 자랑했던 예전의 CIA는 그때 사라진 것이다. 초대 국가정보국장 존 니그로폰테가 미 정보의 총수로 등극했다. 각 정보기관 장들을 불러 회의를 주재하고 정보업무를 조율하여 최종 결론을 내리고 매일아침 대통령과 마주앉아 일일 보고를 해온 CIA국장의 ‘권한’은 니그로폰테에게로 옮겨졌다. 천하의 CIA가 국가정보국장실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
지난 주말 사임한 포터 고스가 CIA국장으로 취임한 것이 그 직전이었다. 강경공화당으로 하원 정보위원장이었던 고스는 이같은 변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정치색이 짙었던 그의 빗나간 경영에 베테란 요원들의 사임이 잇달았다. 몇 달이 못가 잘못된 인사를 후회했다는 부시는 국가정보원장과 사사건건 주도권 싸움을 그치지 않는 고스에게 이번에 해임에 가까운 사임을 요구한 것이다.
고스의 후임엔 8일 마이클 헤이든 국가정보원 부국장이 지명되었다. 같은 예일대 동창인 고스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니그로폰테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자신과 함께 CIA개혁을 추진해 온 헤이든이 국장이 되면 ‘정보 총수’로서의 입지 굳히기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한가지 더 남은 숙제는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들 잡기다. CIA가 휘청거리고 니그로폰테가 아직 자리를 못잡은 와중에서 어부지리로 커진 것이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정보파워다. 정보관련 예산의 80%를 관장하며 전시를 핑계 삼아 종래 CIA가 전담하던 휴먼 스파이활동에 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CIA와의 한판 승부를 끝낸 니그로폰테가 본격적 개혁에 착수하려면 국방부와의 더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서 이겨야한다는 루머가 워싱턴가에 파다하다.
헤이든의 상원 인준청문회는 빠르면 다음주 화요일부터 시작된다. 난항이 예상된다. 두가지 이슈가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현역 군인’과 ‘영장없는 도청’ - 그가 현재 공군대장이며 영장없는 도청프로그램을 주도했던 국가안보국의 당시 국장이었기 때문이다. ‘럼스펠드 앞에서도 소신대로 맞설수 있는 뱃장’ ‘유능한 정보전문가’ ‘강한 추진력’등 그의 장점이 중간선거를 앞둔 의원들의 반대를 얼마나 잠재울 수 있을 지가 관건이다.
시급한 것은 CIA의 재기다. 자긍심 되살리기다. 그것이 새 국장의 우선 임무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사명감은 실종되었으며 유능한 전문요원들은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나섰다”는 망해가는 직장의 모습이 공공연하고 국제정보사회에서도 CIA의 역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귀엣말들이 오간다고 한다.
그건 잠깐 생각해보면 우리를 포함한 미국민 모두를 섬뜩하게 하는 두려운 말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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