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LA타임스는 파격적인 사설을 실었다. 6x4 인치 흰 공간에 단 한 줄만을 썼다. “지금 당장 포괄적 이민개혁안을 통과시켜라” 미전국 대도시의 거리를 메운 수백만 이민자의 파업시위 목적을 한마디로 함축한 것이었다.
그날의 시위는 대단했다. 윌셔를 향한 신문사 유리창을 통해 직접 목격한 라티노의 파워는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 힘이 미국 사회 전반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를 정확히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친이민이건 반이민이건 누구라도 압도당할 만한 인파였다. 그러나 시위의 주목적에는 아직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 이민개혁안이 계류중인 연방상원의 찬반 표수에 별 변화가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파업과 시위가 일을 힘들게 하고 있다. 이건 의회에서 신중하게 협의하며 처리할 사안이지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우려하는 것은 이른바 ‘친이민계’ 의원들이다. 에드워드 케네디등 민주당 의원 사무실엔 불체자 추방을 요구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반이민계’ 의원들에겐 국경장벽 설치에 보태라고 벽돌담은 소포가 줄이어 배달되고 있다. 파업시위는 각기 종래 입장을 더욱 굳히는 명분으로 작용해 의회 내 양극화 현상을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라티노 파워를 실감하며 정치적 득실계산이 없을 수 없다. 빌 프리스트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가 5월말 개혁안 통과전망을 내놓은 것도 발 빠른 정치행보다. 2008년 대통령 후보를 꿈꾸는 그에겐 이같은 진취적 리더십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불체자에는 완강했던 공화당 의원들도 조건부 사면을 들고 나온다. 물론 민주당은 이 좋은 기회를 공화당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다. “글쎄…그렇게 빠른 통과는 힘들텐데” 11월 중간선거까지 끌고가고 싶은 것이다. 민주당과 이민 유권자의 표 동원을 위한 효과적 이슈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민법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난감한 것은 공화당 지도부다. 내분이 심해서다. 부시대통령과 지도층 일부는 초청노동자 확대와 불체자 조건부 사면등을 포함한 개혁안을 수용하자고 하는데, 부시와 정치적 결별을 작심한 일부는 국경장벽 설치부터 보장하자고 주장한다. 국경수비 강화안을 통과 못시키면 보수표밭이 분노할 것이고 불체자 구제를 외면하면 언젠가는 거대한 표밭이 될 라티노 커뮤니티가 영원히 등을 돌릴 것이다. 이민자들 뿐 아니라 공화당의 최대 지지층인 고용주들의 눈치도 보아야 한다.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중단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 주부터는 상원의 ‘포괄적 이민개혁안’ 심의가 재개되리라고 한다. 프리스트의 낙관대로 5월말 경 통과된다 해도 여름 휴회 전에 상하절충안이 대통령 책상에 놓이게 될 전망은 솔직히 어두운 편이다. 강경하기 짝이 없는 하원안과의 절충이 얼마나 험난할 지 누구에게나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원 절충위원회에 누가 참여하는가가 민주 공화 양당 지도부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핫 이슈가 되고 있다.
불체자를 중범죄자로 규정한 하원안을 규탄하며 시위 군중들은 상원법안을 빨리 표결하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류 미디어들도 양원 지도부와 부시대통령의 추진력 부족을 나무라면서 조속한 통과를 촉구해왔다. 그런데 ‘잠깐만…’하는 의견이 이민단체 안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워낙 하원안이 ‘악법’으로 악명을 날리는 바람에 상원안은 무조건 친이민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다. 614페이지에 달하는 이른바 ‘포괄적 개혁안’을 작은 글자까지 자세히 살펴본 이민단체에서 상당한 의혹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법이민자에 대한 추방범위를 확대하는 독소조항도 있다, 사면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수백만의 불체자가 신청 부자격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이건 겉으로는 합법화지만 속으로는 불법에 빠지게 되는 함정 아니냐…’
라티노 지도자들은 개혁안 논쟁을 계기로 표출된 이민자 시위를 ‘제2의 민권운동’으로 키워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면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에 서명한 것은 1964년이었다. 로자 팍스가 버스의 백인좌석에 앉았다 체포된 것은 1955년이었다. 9년이 걸렸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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