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3집으로 돌아온 ‘뜨거운 감자’의 보컬
김C가 최근 자신의 록밴드 ‘뜨거운감자’의 정규 3집 음반을 발표했다.
학창 시절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돈 한 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김C.
지하철에서 세수를 하고 교회에서 잠을 자고, 심지어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며 폐결핵에 걸렸다가 기찻길 옆 공동주택에서 쫓겨났던 경험, 그리고 운명적으로 만난 음악과 사랑 이야기까지...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가수 김C의 파란만장한 인생 행로를 들여다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가수 김C
- 이름이 왜 김C인가요?
처음엔 윤도현씨와 서로 김씨, 윤씨라고 부르면서 시작됐는데요. 지금은 굉장히 맘에 드는 이름이 됐어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불려지는 공정성 있는 이름 같아요.
- 밴드 이름이 ‘뜨거운 감자’인 이유는 뭔가요? 본인이 강원도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구요. 남자 넷이서 의견 일치를 보기가 참 어려워요. 지금은 우리도 성숙한 나이가 됐지만, 10년 전에는 자기 주장이 강해서 팀 이름 만드는 데 의견이 분분했어요. ‘강원도의 힘’ 등 별 게 다 나왔는데, 그 때 제가 키우던 개 이름이 감자였어요. 제가 강원도 사람이기도 하고, 또 감자라는 어감이 좋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감자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땐 다들 귀찮아져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 때 마침 강산에씨가 우리 얘길 듣고 감자 앞에 ‘뜨거운’을 붙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뜨거운 감자’, 뜨거운 우리집 개 이름이 된 거죠.
- 개 이름이 감자라니 독특하네요.
전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연상되는 걸 빠르게 정리하는 것도 잘 하는 편인데요. 감자라는 게 좋더라구요.
- 고향은 어딘가요?
강원도 춘천입니다.
- 야구선수 출신이시죠?
네. 야구선수 생활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습니다.
- 포지션은?
최종으로는 우익수를 맡았어요.
- 그럼 달리기도 잘 하셨겠네요?
달리기도 잘 했고, 어깨도 좋은 축에 속했어요. 근데 타격에는 자질이 없었던 것 같아요.
- 힘에서 좀 밀렸을 것 같아요?
워낙 체구가 작았어요. 지금은 키가 174cm인데, 고 3때는 164cm밖에 안 됐어요.
- 그럼 언제 큰 거에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크더라구요. 참 얄궂죠. 학교 다닐 땐 키 크려고 별 걸 다 먹어봤거든요. 1.5리터 우유를 하루에 3개씩 먹기도 하고. 그래도 안 크던 키가 나중에 컸어요. 그래서 나중에 취미로 야구할 땐 오히려 고등학교 때 던지지 못했던 거리도 던질 수 있게 됐어요. 참 서럽기도 하고, 섭섭하더라구요.
- 고등학교 때 이성에게 인기 있었나요?
인기도 없었을 뿐더러 관심도 별로 없었어요.
- 마음도 많이 어렸던 것 아니에요?
그랬을 거에요. 이성친구를 사귄 것도 20살이 넘어서였어요. 그 전엔 생각도 못했고, 용기도 없었고, 여러 가지로 움추러들었던 것 같아요.
- 옆에서 보니 손이 굉장히 특이하게 생겼어요?
전형적으로 ‘노동을 못 하는 손’이에요. 제가 노동을 굉장히 못 해요. 노동하는 단체에 가면 제가 분위기를 다 흐려요. 막노동 일도 해봤는데, 담당자가 ‘넌 이거 할 팔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돈 주고 그냥 가라고 하더라구요. 학교 다닐 때 제설작업 같은 거 해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답답하다면서 굉장히 짜증내요. 작업 능률적으로 제가 굉장히 방해가 되는 거죠. 열심히 하는 애들 힘 빠지게 하는 거에요.
- 그런 사람들이 주로 예술 방면으로 오잖아요?
할 일이 그것밖에 없어지는 거죠.
- 이외수 선생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제가 윤도현 밴드와 함께 전국투어 공연을 했는데요. 윤도현씨가 먼저 이외수 선생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춘천 공연 때 이외수 선생님을 초대했더라구요. 저희 밴드는 오프닝 공연을 먼저 하고 로비에 나와 있는데, 이외수 선생님도 나와 계시더라구요. 그 때 처음 만났어요. 그 뻘쭘하고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이외수 선생님이 저에게 말을 거시더라구요. 다짜고짜 저한테 굉장히 잘 될 거다, 색시가 고생할 거다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책에다가 싸인과 함께 색시 만세라고 써서 주시더라구요.
- 고등학교 때 생활은 어땠나요?
정규수업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학교 운동부 생활이었죠.
- 춘천고교는 어떻게 들어갔나요?
야구 특기자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 특기생으로 뽑혔었어요.
- 야구는 왜 그만 두신 거에요?
오라는 대학이 없어서 그만 둔 거죠. 그래서 대학은 다닌 적도 없고, 그 다음부터는 떠돌이 신세가 됐죠. 할 게 없었어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갔어요.
- 심각한 방황의 나날들이었을 것 같아요.
그 때는 막막했죠. 시즌이 끝난 뒤에 수업은 안 들어가고, 졸업 때까지 시간은 남아돌고, 그 몇 달 동안 고등학생들이 애늙은이같이 닭갈비집에 앉아서 술 마시면서 신세한탄 하고 있는 거에요. 학원 스포츠의 문제점이죠.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운동 진로가 끝나면 굉장히 방황할 거에요. 배운 게 없으니까 멍하니 앉아서 친구들끼리 이제 뭐 하나 이런 얘기나 하면서.그 때 친구들이 저한테 넌 노래 잘 하니까 가수나 하라고 했어요. 근데 그 순간 바로 난 이제부터 가수!라고 마음 먹고, 무협지처럼 ‘성공하기 전엔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 삼류영화 같은 대사를 남기고 큰 가방 하나 메고 떠난 거에요.
- 어디로요?
일단 춘천을 떠나서 서울에 왔는데요. 사실 서울은 시합 때 외엔 와본 적도 없고, 당시엔 기타도 못 쳤고, 곡도 못 썼고... 무작정 ‘난 가수’라는 생각만 갖고 나왔는데 할 게 없는 거에요. 근데 이상하게 김수철 아저씨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만나서 가수를 하겠다고 얘기하려고 물어물어서 김수철씨 댁에 찾아갔어요. 소속사에 거짓말도 해가면서. 그렇게 김수철씨 댁에 찾아갔는데, 집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차를 닦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김수철씨 안에 계신가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오.라고 하시길래 그냥 왔어요.
- 그 때가 몇 살이었어요?
20살이었어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후로 비참한 생활이 시작됐어요. 돈 없이 가방 하나 메고 전국을 떠돈 거죠. 중간에 친구들 만나면 친구들한테 얼마 받기도 하고,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잠은 주로 교회에서 자고, 전철역에서 세수하고 이 닦고, 또 돌아다니고.
그 당시엔 변진섭씨, 이승철씨 등이 인기가 많았는데, 그 분들은 다 유명 작곡가가 곡을 써줬어요. 그걸 보면서 어린 나이에 ‘만약 그 작곡가들이 삐져서 곡을 안 써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든 내가 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악기를 배워야 할 것 같았어요. 근데 일단 악기는 못 다루니까 가사라도 쓰자고 생각해서 노트에 계속 가사를 썼어요. 걷다가 양화대교 위에서 쓴 가사도 있어요.
그러다가 기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한테 기타를 사달라고 했지만 당연히 안 사주셨죠. 대신 운전을 배우라고 주신 돈을 가지고 기타 학원에 갔어요. 근데 그 학원에서 여자 수강생한테만 잘 가르쳐주고 저한테는 잘 안 가르쳐주는 거에요. 여자 수강생은 뒤에서 안아가면서 자세히 알려주는데, 저한테는 그냥 책 보고 하라고 하고. 그래서 그 다음날로 안 나갔어요.
그리고나서 돈이 다 떨어져서 다시 속초로 갔어요. 한량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죠, 돈 떨어지면 아버지에게 가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참 한심한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몇 대 쥐어패주고 싶을 텐데. 왜 집안 다 말아먹는 아들 많이 있잖아요. 잘못하면 제가 그렇게 될 뻔 했죠.하여간 그렇게 속초로 갔는데 길에서 너무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그래서 그 친구 하숙집에 들어갔는데, 어느 하숙방에서 운명적으로 노래가 들리는 거에요.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라는 곡이었어요. 하숙집 제일 끝 방에서 누군가가 클래식 기타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에요. 그 노래를 듣고 제가 너무 궁금해서 문을 열어봤어요. 뚱뚱한 남자애가 클래식 기타로 노래를 부르다가 절 쳐다보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인사하고 문을 닫았어요. 그 옆방에 제 친구 방이었어요. 그래서 제 친구한테 저 사람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어제 처음 봤다고 하더라구요. 그 날부터 제가 그 친구 집에서 살면서 기타를 배웠어요.
그 친구도 사실 정석은 아니었는데 저한테는 대단했던 거죠. 그러면서 기타를 배우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거에요. 걔네들은 학교 간 시간에 저는 남의 하숙집에서 남의 기타 잡고 노래를 불렀어요. 맨날 시끄러우니까 하숙집 아저씨가 내려와서 넌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죠. 그래서 몰래 숨어서 친구들에게 빌붙어서 살았죠. 그러다가 결국 하숙집 아저씨가 화가 나셔서 결국 집을 팔아버리신 거에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데 그 반대 상황이 된 거죠. 게다가 제 친구 술버릇이 너무 안 좋았어요. 술 마시고 공중전화기를 들고 오기도 하고, 싱크대에다가 오줌을 싸기도 하고. 아무튼 하숙집에 바람 잘 날이 없었어요. 나중엔 방이 너무 지저분해지니까 담배를 그냥 바닥에 끄기도 했어요.
- 그럼 잠은 어디서 잤어요?
걔 방에선 안 잤어요. 다른 애들 방에서 잤죠. 나중엔 제 동창보다 기타 치던 뚱뚱한 친구랑 더 친해지게 되서 기타 배우고, 동네에서 공연도 하고, 그 때 처음으로 곡을 썼어요.
-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곡을 썼나요?
저희 앨범이 3집까지 나왔고, 대략 40여곡 정도 곡을 쓴 건데, 악보가 한 장도 없어요. 악보를 봐야 할 의미도 없고요. 오늘 이 노랠 불렀는데, 만약 내일 일어나서 기억 못 하면 이건 나쁜 노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좋은 곡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도 기억에 남을 거라고. 근데 사실은 잊어버릴까봐 불안해서 누워서도 계속 흥얼대다가 잠을 못 자기도 하고. 그래도 악보는 없어요.
- 가수는 어떻게 됐나요?
군대 갔다온 다음에 정말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울에서 생활했어요. 형 집에 잠깐 얹혀 살았는데, 어느 날 형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집을 나가라고 말하더라구요. 참 고마운 일이었죠. 왜냐면 그렇게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날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죠. 저 같아도 그런 용기가 없었을 것 같아요. 근데 형이 나가라는 얘기를 해준 거에요. 사실 이 일 때문에 형이나 형수님은 제가 삐져있다고 생각할 거에요. 물론 그 때는 충격이었지만.
마침 그 때 TV의 모 프로그램에서 일산의 막걸리집이 나오는 거에요. 그걸 보면서 ‘돈 생기면 저기 가서 꼭 막걸리를 마셔봐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실제로 만 원이 생겨서 아는 형과 함께 그 막걸리집으로 갔어요. 대낮에 낮술을 마시면서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불렀죠. 그랬더니 가게 주인 아저씨가 너 그냥 여기 살아라고 하시더라구요. 전 마침 집에서 쫓겨난 상황이어서 정말 고마웠지만 그래도 좀 튕기는 척도 하고.
근데 마침 가게 옆 비닐하우스에 강산에씨가 살고 계셨어요. 사장님이 옛날에 강산에도 여기서 일하다가 가수가 됐다면서 데모 테입 만들어놓은 거 있으면 강산에한테 소개시켜줄게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때 강산에씨를 만난 거에요. 당시 강산에씨는 ‘라구요’랑 ‘넌 할 수 있어’라는 노래로 인기가 좋았어요. 강산에씨가 제 데모테입을 듣더니 더 연습해라 그러시더라구요. 그 얘기를 굉장히 순순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바로 그 날로 짐 챙겨서 막걸리집으로 와서 3년 동안 서빙도 하고, 노래도 하고, 비닐하우스에 살게 된 거에요.
강산에형은 바쁘게 활동하셨지만 밤에는 저랑 술 마시면서 음악적인 얘기도 하시고... 저에겐 그게 너무 꿈같은 생활이었어요. 월급이란 게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월급도 안 받았어요. 재워주고, 먹여주고, 노래도 하게 해주고, 더군다나 거기서 손님으로 온 색시도 만나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고.
근데 연애를 하다보니까 돈이 있어야겠더라구요. 그래서 1년 반이 지나고 처음으로 한 달에 70만원씩 받았어요. 근데 이게 원양어선 탄 상황하고 비슷한 거에요. 돈을 쓸 데가 없다보니 두 달 지나고 140만원이 모여있더라구요. 저한텐 너무 큰 돈이라 손이 막 떨리는 거에요. 그랬더니 색시가 자기가 관리해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두 달 동안 돈을 모았는데, 몸이 좀 이상한 거에요. 계속 기침을 하고 등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계속 파스를 붙이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병원에 갔다가 검진을 받았어요. 근데 폐에 구멍이 나있더라구요. 폐결핵이었어요. 상태가 심각해서 바로 입원하라고 하더라구요. 당시 몸무게가 쟀더니 53kg이라서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입원했는데, 희한하게 병원비가 딱 140만원이 나온 거에요. 퇴원하니 돈이 또 빵원이 된 거에요.
당시 저는 철길 옆에서 살았었어요.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고, 벽지는 신문지로 발라진 집에 살았죠. 근데 퇴원해서 룰루랄라 철길을 딱 넘는데, 저 앞에서 큰 리어카가 보이고, 그 안에 어디서 많이 본 짐이 있는 거요. 그래서 달려가봤더니, 색시가 비포장 언덕길에서 짐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고 있는 거에요. 집에서 쫓겨났다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더라구요. 그 땐 정말 서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저는 깜짝 놀래켜주려고 색시한테 말도 안 하고 퇴원한 거였는데, 마침 거기서 만난 거죠.
그 후로 다시 가게 이층에 가서 살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살다가. 그렇게 1년 반 정도 더 일하다가 나왔어요. 매너리즘에 빠지더라구요. 계속 술 마시는 사람들 상대로 노래를 부르다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밴드를 만들기 시작해서 한명한명 만났죠.
- 그렇게 고생하다가 ‘나 이제는 됐구나’ 라고 느꼈을 땐 언제였나요?
광고를 많이 찍게 됐을 때. 그리고 가족들이랑 어디 다니기가 불편해지고, 밥 먹거나 차를 마실 때 시선이 계속 나에게 꽂혀있을 때. 잘 됐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이젠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는구나 싶었는데,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로 인해 난폭해지고, 화도 많이 났어요. ‘내가 원했던 게 이건가’ 혼란스러워진 거에요. 제가 늘 타고 다니던 좌석버스를 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승객 전부가 저를 보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바로 전날 야심만만이 방송됐더라구요. 방송 한 번으로 그렇게 됐다는 데서 무척 놀랐어요. 너무 급격하게 변화된 거에요. 조금씩 변한 게 아니라 손바닥 뒤집듯, 자고 나니까 달라져버렸죠. 그래서 많이 힘들었어요.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가운데 수돗가도 있고, 작은 텃밭이 있고. 아이가 흙 밟고 살 수 있는 동네였으면 좋겠어요. 저녁 때 개 다운 개를 끌고, 슬리퍼 끌고 마실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랑 같이 하드 빨면서, 저녁 때 곡 만들고, 계속 멍하니 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꿈이 참 소박하네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요. 마당 있는 집에서 살려면 돈도 꽤 있어야 해요.
▶ 진행 : 공지영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월~토 오후 4시 5분~5시)
▶ 한글주소 : 특별한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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