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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MD>
워싱턴 DC를 구경하다보면 유대인들의 학살을 기념하여 세운 Holocaust 박물관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게 된다. 4월의 벚꽃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 박물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벚꽃의 화려함과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박물관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마치 이것이 인생의 두 가지 면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인생은 누구나가 꽃처럼 살고 싶어한다. 이해인 수녀의 시에서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 없이 고요한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 오는 꽃처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꽃이 되어 향기를 뿜으며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으며, 사랑을 주며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느 사람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거의 모두는 꽃처럼 살수 없는 것이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과 사랑으로 아름다운 결혼을 했지만 결국 슬픈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꽃처럼 살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한마디의 멜로디를 부르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참아내며 기나긴 시간을 견디어야 하는 슬픈 가시나무새와 같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그것을 고난과 고통이라고 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분을 향한 예정이었고, 그 분이 또한 선택해야만 했던 단 하나의 길이었다. 그래서 늘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왜 이 땅에 와야 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도 자주 말씀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33년 동안의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브리서 5:7)
‘심한 통곡’과 ‘눈물’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예수님이 걸었던 인생이 힘들었는가를 그림을 보듯이 깨닫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통곡했으며, 얼마나 괴로웠으면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것을 묵상할 때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애처롭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 이사야 53장에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고난이고, 십자가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끌기 위해서 혼자 당하는 희생적인 고난이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라고 하셨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때때로 고난과 고생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주머니에 버스 탈 수 있는 돈이 있는데 구태여 버스 타지 않고 걸어서 집에 가면서 나는 고난받으며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고생의 길인 것이다. 죄가 있어서 매를 맞으면서 그것도 고난 당한다고 한다면 스스로 위안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감동을 줄 수는 없다.
진정한 고난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걷는 인생을 말한다. 성경에 서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은 그렇게 살았다.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고, 환난, 궁핍, 곤란, 매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죽음의 위험 등 여러 일을 당하였다.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전도자의 길이었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도 살아난 사람이었다. 수용소에서 아내와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버텼다. 그는 어떤 상황이 자기 앞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수용소의 시간들이 고난의 삶이라고 생각했고, 참아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시달리며 사는 인생’, 즉 단순한 고생스러운 인생보다 ‘시도하며 사는 인생’, 즉 고난을 참고 견뎌 무엇인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결론을 내리고 견디고 또 견디었던 것이다.
어느 신문 기자가 말했듯이 “이민자의 삶은 도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도전이냐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고난을 위한 도전이냐 아니면 고생을 위한 도전이냐를 물어야 한다. 고난을 위한 도전이라면
그 삶은 힘들지만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고생을 위한 도전이라면 단 한 사람으로부터는 박수를 받을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 말이다.
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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