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희망을 주고 기쁨에 들떠있을 때 절제시켜줄 수 있는 것을 구해오라” 해답을 찾아 고심하던 신하들은 마침내 반지 하나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 반지에는 현자로부터 전해들은 한마디가 새겨져 있었다. 성공했을 때 자만에 빠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절망하지 않는 힘을 주는 지혜의 말이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월 속엔 성공보다는 실패에 부딪치는 경우가 훨씬 더 잦다. 좋은 일 보다 참고 견디어 내야하는 나쁜 일이 더 많은 우리들에게 모든 인생의 과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커다란 위안인가. 어떤 나쁜 일도 머지않아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지난 몇주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가족 동반자살이 잇달아 발생했다. 충격적 보도에 이어 사건 원인에 대한 추측과 진단, 대책과 처방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 끔찍한 참극으로 내몬 것일까. 각각의 상황이 달랐듯이 제각기 절망의 양상도 달랐을 것이다. 죽은 한사람을 두고 한 친지는 포악한 가장이었다고 하고 다른 친구는 자녀를 너무 사랑한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사업의 실패, 가정불화, 마약과 도박, 우울증, 소외감, 상대적 빈곤감, 자녀에 대한 비틀린 집착…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주변의 이야기는 추측일 뿐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자살에 대한 원인은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다각도로 연구해왔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규칙성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 정신과전문의는 “자살은 도식화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현상이다. 즉 우리는 ‘그’가 왜 자살했는지는 알 수 있어도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가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복합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박했을 한사람 한사람의 죽음을 통계수치로 묶어버리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미국에선 매년 3만명이 자살한다. 하루 80명꼴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4배나 많다. 사망원인 8번째로 기록되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자살은 유족들에 의해 ‘사고사’로 덮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살미수는 매년 30만명에 이르고 동반자살의 희생자도 1,500백명이나 된다.
이런 통계수치를 모아놓은 사이트의 마지막 부분쯤에 사족처럼 한마디가 붙어있다. ‘수많은 저서들이 자살의 동기를 분석했으나 공통된 답은 한가지다 :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누구나의 삶에는 길고 짧은 고통의 터널이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터널은 그다지 길지 않아 쉽게 지날 수 있지만 때로는 일생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어두운 터널에 갇히기도 한다.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것은 당장에 갇혀있는 상태보다 이 상태가 앞으로도 나아지질 수 없다는 절망이다. 아침마다 눈뜨고 싶지 않은 막막함, 그 캄캄한 좌절의 한가운데 서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과 그 절망에 무너지는 사람, 그 차이가 생과 사를 갈라놓는 절대적 결과를 빚기도 한다.
끝이 없는 터널이 없듯이 계속되는 고통도 없다. 젊은 날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랑의 아픔이 이젠 그립기까지 한 추억으로 남아있듯 사업실패와 가정불화로 죽고 싶은 중년의 고통 또한 세월이 흐른 뒤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고통이 머지 않아 지나가버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희망을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한인커뮤니티에서도 또 LA시와 카운티 정부에서도 더 이상의 가정비극을 막기위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한다. 최소한이라도 사회적 안전망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우리 스스로도 각자의 안전망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아이들을 함께 죽음으로 몰고가는 아버지도 있지만 절망에 빠진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다. 희망은 자녀의 웃는 얼굴에서 찾아낼 수도 있고, 지친 일상으로부터 잠시라도 자유로워지는 취미에서 얻어낼 수도 있으며, 연두 빛으로 물오른 봄길의 가로수를 보면서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 빛이 안보이는 절망에 압도당한다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 현자의 지혜를 믿어보기 바란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안타까워하고 자녀와 나를 분리시키지 못하는 가족주의를 공유한다 해도 그들의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미국에선 동반자살이란 말은 잘 쓰지 않는다. murder-suicide, 살인자살이 맞다. 한없는 고통 속에서도 한없는 용서를 베풀며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께선 인간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가해자인 그 부모들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을까. 가장 믿고 사랑하던 부모의 손에 생명을 잃은 아이들의 환영을 떨치기 힘들어하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금년엔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다. 아름답고 힘찬 생명력을 전이받고 싶은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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