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장기영 사주가 윤전기에서 막 인쇄돼 나온 신문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사는 詩가 탑? 사자후 아련
우리는 툭하면 그를 왕초라 불렀다. 본인 자신도 이 별명에 무척 만족했던 듯 싶다. 왕초는 한국일보 창업주 고(故) 백상(百想) 장기영의 별명이다.
생전의 왕초는 매주 화요일 기자 전원을 편집국에 모아놓고 사자후를 토했는데, 쇳소리 넘치는 그의 연설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공포와 경탄, 때로는 폭소에 빠트렸다.
한마디로 일사천리, 쾌도난마요 연설 한마디 한마디가 번쩍이는 기지와 높은 문학성, 눈이 번쩍 뜨일 정보로 가득 차, 지금도 서울 중학동 한국일보 건물에 들어서는 내방객은 다음과 같이 쓰인 액자와 만난다.
“한국일보 창간일(6월 9일)의 6자와 9자! 이는 쓰러지면 다시 벌떡 일어나는 오뚝이를 닮지 않았는가. 한국일보의 정신은 바로 이 오뚝이 정신이다.” 1968년 불탄 사옥을 다시 짓고 지금의 중학동 건물 첫 입주식에서 그가 즉석에서 토해 낸 개구(開口) 일성이 이처럼 기록으로 남아있다.
때로는“기사는 시(詩)가 돼야 한다”고도 했다. 한국일보 지면에 실리는 기사 모두가 언젠가 시로 메워지는 날이 와야 한다며, 실제 한국일보 지면 1면에 매일 시를 싣는 발행인이었다. 또 툭하면 “특종은 일요일 아침에 터진다”고 갈파, 노련할수록 방심하게 마련인 기자의 교만과 허세를 경계했다. 왕초의 이 경계를 엄수했기에 한국일보는 60년대 중반‘케네디 대통령 피살’을 특종 했다. 또 이 경계를 깜박했기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사망’을 경쟁지에 낙종 했다.
그는 주야로 엄청난 책을 읽어 제켰는데, 한국일보 도쿄 특파원의 고정 업무가운덴 당시 일본에서 화제에 오르거나 베스트셀러가 된 신간을 구입, 서울로 직송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그가 때도 시도 없이 토해 내는 명 연설은 바로 이 독서의 산물이었다. 그 연설 가운데 30여 년 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억되는 대목이 하나 있다. 부하를 독전(督戰)하는 일본 전국시대 어느 번주(藩主)의 용병술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일본의 한 지방을 장악하는 번주가 다른 쪽 번주한테 서찰(書札)을 보낸다. 그 서찰을 품에 넣은 졸(卒)은 밥 한 톨 물 한 모금 삼키지 않고 사흘 밤 사흘 낮을 쉬지 않고 달려, 저쪽 번주한테 전하며 거의 탈진상태로 죽어간다. 그러자 서찰을 받은 번주는 졸을 당장 목 베라고 호통친다. 하루 반이면 충분히 올 거리를 사흘 걸려 왔다는 죄다.”
그러나 이 호통으로 그 졸은 살아난다. 왕초의 설명인즉, 가만 놔두면 그 졸은 과로와 기아로 십중팔구 죽게 마련이라는 것. 목 베라고 호통치고 기압을 넣었기에 살아났다는 얘기로, 얼핏 가진 자 또는 권력을 쥔 자의 폭력을 미화시키는 살벌한 얘기로 비칠지 모르나, 정작 내가 관찰한 왕초는 이와는 거리가 먼, 특출한 유머와 위트를 지닌 유럽형 자유인(Le Libre)이었다.
70년 초 김포 국제공항 출입기자 시절이다. 출국 차 공항에 나타난 왕초가 탑승을 위해 출국대기실을 통과하던 중 그의 눈에 ‘LADIES’라 쓴 여자 화장실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 표지판엔 하필이면 중간의 I 자가 빠져 있었다. 이를 본 왕초가 예의 벽력같은 쇳소리로 공항 측의 태만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의 탑승을 돕던 김포 공항장과 대한항공 공항지점장의 얼굴이 대번에 흙빛이 되었다. 왕초는 이어 나를 불러 세우더니 “그것도 하필이면 한가운데 글자가 빠졌지 않았나 말이야! 저 경우 한 가운데가 제일 중요한 거야!”라고 호통쳤다. 순간 그의 뒤를 따르던 공항장 등 30 여명의 수행 객 모두가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정작 그가 가장 왕초다웠던 점은 휘하의 기자 모두를 친자식처럼 아꼈다는 사실이다. 76년 내가 미국 미네소타주에 유학했을 때다. 당시 미 대통령 후보 유세차 미니애폴리스에 들른 지미 카터 후보를 만나 “주한미군은 빼되 대신 주한 공군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이를 단독 인터뷰로 서울에 송고하고 나서 이틀이 지나서다.
내가 머무는 대학 기숙사에 전보 한 장이 날아들어 펴 본즉 “브라보, 김승웅!”이라 쓰인 왕초의 축전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나의 가친 집에 손수 전화를 걸어 “평소 어금니처럼 아끼는 기자”라 격찬했다는 걸 귀국하고서야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 허나 그 왕초한테 나는 귀국 신고를 하지 못했다. 나의 귀국 두 달 앞둔 77년 4월, 그가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 4월이다. 고인이 생전에 애송하던, 고(故) 신석초 시인의 시‘바라춤’을 새삼 꺼내 읽어본다. 시의 서문처럼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 계절이다. 왕초! 이 화창한 봄날 당신한테도 저 두견 소리가 들리는가.
김승웅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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