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입구가 열렸다. 주차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교통순경처럼 한 차 한 차 방향을 제시해주며 주차를 돕고 있다. 오늘은 무슨 이벤트가 있는 모양이다. 엘에이 다운타운에 위치한 컨벤션 센타 주차장을 내 전용 운동장으로 지정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첫 날엔 한 겨울 찬바람이, 몇 안되는 바싹 마른 낙엽을 이리 저리 몰고 다녔다. 엘에이의 겨울답지 않은 매콤한 바람을 동반했던 햇빛마저도 새촘하니 차가운 표정이었다. 주차장엔 차 서 너대만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진짜 내 전용 운동장이었다.
올림픽 길과 휘게로아 길에 위치한 컨벤션 센타 주차장은 대강 세어 보니 천대의 자동차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일주일에 사흘은 근처 사무실로 일을 나온다. 창가로 위치한 사무실이 아니어서 하루 온종일 형광등 불빛에 두 눈이 피곤하다. 또한 히터나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정신 사납다.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점심시간이다.
차 트렁크에 얌전히 누워있는 인라인 스케이트, 아이스 스케이트, 테니스 라켓, 그리고 스쿠터를 마주한다. 시간 절약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스쿠터를 꺼낸다. 교회 어느 젊은 엄마에게 얻었던 거다. 아이들이 커서 쓸모 없어진 스쿠터 있음 달라고 했다. 입이 벌어져 말도 못 하던 표정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보다 12년이나 아래인 자기도 탈 생각을 안 하는 스쿠터를 직접 타겠다고 달라는 아줌마가 좀 정상이 아닌 듯 보였던 게다.
사무실 주차장에서 내 운동장까지 세 블록 정도 가야한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가면 신호등 있는 길, 그냥 길을 셋이나 건너야 한다. 약간 위험하다. 급정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아 신고, 가고 오고, 또 갈아 신고, 시간이 제법 걸린다. 운동할 시간이 줄어든다. 인라인 스케이트는 율동적이고 타는 기분도 훨씬 즐겁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스쿠터를 택한다. 손쉽게 곧 시작할 수 있고, 언제든 급정거가 가능하다. 길 건너는 일도 문제없다.
혹시라도 주차요원이 나를 안 들이면 어쩌나. 나가라고 하진 않을까. 조심스레 다가가 오늘은 무슨 이벤트가 있냐고 물었다. 심한 스페인어 억양의 청년이 아이스 쇼라고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답한다. 몇 번을 다시 물어 겨우 알아들었다. 순간 나는 예쁜 무용복을 입은 스케이터가 된다. 오늘 이 운동장은 아이스링크가 되고 나는 아이스스케이트를 타는 열 댓살 소녀가 된다. 오색 조명이 내게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다. 가볍게 미끄러져 나간다. 한 쪽 다리가 높이 하늘을 향해 들린다. 두 팔은 활짝 기지개를 피며 엘에이 다운타운 높은 빌딩들을 끌어안는다. 아아 기슴 가득 차 오르는 행복감. 신이 난다.
갑자기 차 한대가 나를 향해 온다. 아앗, 비켜야 하는데. 얼음을 긁으며 세우는 대신 스쿠터에서 얼른 두 발을 내린다. 땅을 밟는 순간 선다. 예쁜 무용복의 소녀는 사라지고 좁아진 운동장 구석으로 몰린 아줌마 하나 서 있다.
어느새 가까이 와 있는 주차요원에게 환한 미소 한아름 안겨 준다. 운동이 많이 되겠다며 부러워한다.
무슨 운동을 해야 하나? 어디를 가야 하나? 꼼짝하기 싫은데, 시간이 어디 있어야 말이지. 같이 할 사람도 없다. 다운타운 공기가 너무 나빠서 차라리 사무실에 있는 게 몸에 더 좋겠다. 점심시간에 운동하면 점심은 어쩌구? 방법이 없다. 같이 짝짝꿍하며 놀아 줄 사람도 없다. 펼썩 주저앉기 십상이다.
올림픽 길 쪽으로 말쑥한 정장차림의 중년이 지나간다. 분명 한국 분이다. 이 시간에 이 길을 걸어서 지나다니. 그의 뒤를 눈으로 좇으며 스쿠터의 속력을 줄인다. 옷차림이 한국에서 다니러 오신 분 같다. 블럭 끝까지 가시더니 길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다시 이쪽으로 오신다. 혹시? 괜한 걱정이겠지. 그래도 혹시? 어쩔까 머뭇거려본다. 용기를 내어 다가간다. “혹시….길 잃으셨나요?” 대뜸 자신있게 답하신다. “아아뇨” 아하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싶어서.
혼자 운동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이벤트에 따라 장소도 바꿔보고, 나 자신도 바꿔 본다. 항상 기쁜 마음이 만들어 보이는 행복한 미소를 하늘로 올린다. 감사함의 표시다. 오늘처럼 혹여 사람을 만나면 말 한마디 정답게 건네 보기도 한다. 어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이렇게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잘 놀아야 한다. 아니면 사는 자체가 짜증스럽고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기제
■<문학세계> 수필 당선/<한국수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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