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체자로 갖은 고생끝 별세한 서병섭씨 사연
1986년 3월 6일 미국에 도착했던 서병섭씨는 정확히 20년 후인 2006년 3월 6일, 미국 영주권을 손에 잡아보지 못한 한을 가슴속에 남겨둔 채 향년 68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한국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서씨는 미국에 가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인생을 바꿀 굳은 결심을 한 채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20년 동안 세 차례의 영주권 신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그린 카드를 만져보지 못했다.
사촌 형의 초청장과 한국에 있는 브로커를 통해 얻은 취업비자로 시카고에 도착한 서씨는 세탁소에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두고 온 아들과 딸들을 생각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던 그는 우드스탁에 있는 한인 인삼밭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 후원을 받아 첫 번째 영주권을 신청했다.
같은 곳의 후원을 받아 2~3달 전에 영주권을 신청했던 선배들은 쉽게 일이 풀렸으나 유독 서병섭씨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던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다. 서병섭씨의 5촌 서용기씨는 그 당시에 당숙께서는 자신의 영주권 서류 신청을 대신해줬던 브로커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일이 꼬인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참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몇년 뒤에 한 한인 여행사에 일하게 되면서 또다시 영주권 신청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역시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만 날린 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새벽 3~4시에 일 하러 나가서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는 힘든 나날을 보내며 버는 돈은 족족 한국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냈다.
자식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려면 영주권이 필요했지만 그는 몇달 동안 유효했던 취업 비자가 이미 만료돼 시카고 생활 10년이 넘었어도 불법체류자가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이제는 영주권을 후원해줄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번 돈으로 조그만 세탁소를 직접 차렸지만 자신의 영주권 신청을 진행시킬 만한 규모에는 한참 못 미쳤다.
불체자로 세탁소를 꾸려나가는 것에도 어려움은 많았다. 밑에 직원들을 고용해 사업 규모를 늘려나가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영주권을 받는데 행여나 도움이 될까봐 세금 보고를 많이 하는 것뿐이었다.
중·고등학생이던 자녀들도 이제는 어느덧 장성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게 됐기에 아버지를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설득도 했지만 서병섭씨는 영주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세탁소를 그만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학수고대하던 영주권 대신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암 선고가 내려졌던 것은 올해 1월. 서씨는 감기에 걸린 줄 알고 네이퍼빌의 한 한인 의사에게 찾아가 처방 받은 감기약과 위장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자, 다른 한인 의사에게 찾아가 보았다. 그 의사는 여러 가지 증세를 물어보고 피검사를 한 뒤, 일단 병원에 입원하고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서씨에게 전했다.
하지만 서병섭씨는 의료 보험도 갖고 있지 않았고 병원에 가면 큰돈이 든다는 걱정 때문에 계속 고통을 참아냈다고 한다. 결국은 아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알링톤 하이츠의 노스웨스트 병원에 입원해 종합 검사를 받은 결과 간암 판정을 받았다.
보험이 없는 그가 미국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보증금이 많이 필요해, 한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가족들의 권고에 서씨는 이대로 한국에 가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망설였다고 한다. 평소에 많은 세금 보고를 했던 그는 저소득자를 위한 의료비 혜택도 못 받는 처지였다. 쿡카운티 병원과 집을 오고가며 기본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항암치료나 수술을 받기에는 이미 그의 체력이 바닥 나 있는 상태였다.
전라남도 광양이 고향인 서병섭씨는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미국에 온 자녀들에게 20년 동안 얼굴 한번 못보다 폐암으로 미리 세상을 떠난 친형이 보고 싶다며 내가 미국에 와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꼬박꼬박 세금을 냈지만 영주권 한번 손에 잡아보지 못한 것을 보니, 미국은 내가 쉴 곳이 못 되는 것 같아 고국인 한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쿡카운티 병원의 담당 의사는 마지막 소원이니 만큼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바로 다음날 서씨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돼서 결국 그는 며칠 뒤인 3월 6일, 그가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시카고에 도착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날에 그토록 영주하고 싶었던 미국 땅에서 하직하고 말았다. 화장된 그의 유골은 두 딸에 의해 3월 13일 한국으로 건너가 경기도 용인의 한 납골당에 안치됐다.
<이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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