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를 따라 길게 설치된 의자는 이 건물을 상징하듯 딱딱하고 차가웠다. 어중간한 위치에 책상다리 자세로 올라앉아 어색함을 감추려 책을 펼치니 복도 끝에 있던 적막감이 책장을 넘기는 손등을 타고 넘어 반대쪽으로 줄달음 친다. LA 다운타운에 위치한 형사법원. 법정의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으로 우르르 빨려 들어갔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오전 내내 그들 사이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나를 주눅들게 해 혼자 남는 편을 선택했다.
두 달 전쯤 법원에서 배심원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받을 때마다 번거롭고 불편한 그것 5일 안에 답을 해야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기간을 넘겼고 그 동안 여러 번 핑계 대며 불참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기로 작정했다. 경험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조건 “노 잉글리시”를 외치라는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 받아 참석했다. 법정 안에는 판사, 속기사,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0명의 배심원 대기자들 중에 12명을 선정해 앞으로 진행될 25일간의 재판에 배심을 맡아야 한단다. 이번 케이스는 살인 사건으로 검사가 이미 유죄로 인정하여 가해자를 기소한 다음 판사의 판결 전 그 사건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배심원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매년 약 12만 건에 이르는 배심원재판을 한다는데 그 중심에 내가 앉아 있게 된 것이다. 나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던 법원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 할 위치에 서게 된 것이 며칠 전부터 마음 무겁게 해왔다. 더구나 영어가 서툰 내가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판사는 대기자들을 18명씩 조를 짜서 배심원 석에 앉히고 한 사람씩 일일이 개인적인 것을 물었다. 가족관계, 사는 지역 혹시 지인들 중에 법조계나 공무원 특히 경찰에 관계한 사람이 있는지 등의 예상 질문을 했다. 한 예로 가정주부인 50대 백인 여인에게는 “낮에 과자를 다섯 개 구워 부엌에 두고 외출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두 개만 남아 있었다. 아들에게 물어 보니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의 입 주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이 상황을 당신은 어떻게 판단하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라며 개인의 입장에 맞을 질문들을 던지는 판사의 지혜와 예리함에 놀랐다. 검사와 변호사는 그 답변을 듣고 이리저리 유도 심문을 하며 그 사람의 판단 능력과 도덕성 등 자격을 가름하는 모습에서 배심원 선정 과정이 아니라 진짜 재판을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진지하고 치밀했다.
배심원제도는 시민을 직접 재판과 기소 등에 참여시키므로 시민의식을 높이고 직업 법관이 지니는 한계와 사법 불신을 극복하며 구두변론과 증거 또 집중심리 등이 충실한 재판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장점이다. 반면 배심원단을 유지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투입돼야 하고 법적 지식의 부족과 이론의 공방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인식에 따른 선입관과 편견들이 영향을 미치므로 사실인정을 그르칠 수 있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얼마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마이클 잭슨의 평결에서는 배심원 두 명이 다른 배심원들의 압력에 굴복해 무죄평결을 내리고는 나중에 양심선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리가 불편해 가시방석이었는데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용수철처럼 퉁겨져 복도로 나왔다. 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넘기는데 마음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법과 정의란 무엇인가. 객관성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누군가의 죄를 다룰 자격이 있나. 편견으로 뭉쳐진 나의 생각이 주관적이라는 포장을 해 놓지는 않았을까. 죄를 미워하지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법 지식도 없고, 사리판단에 앞서 인정에 이끌리는 내 성격도 문제지만 더 큰 장애는 언어에 있다. 오전 내내 그들의 입만 쳐다보며 있다가 어쩌다 귀 끝에 걸리는 단어 한 두 개로 얼추 내용을 꿰어 맞추는 수준인데 더욱이 살인사건의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 못할 것은 뻔하다. 결론은 하나. 내 차례가 되면 판사에게 “노 잉글리시”를 외치리라. 첫째는 언어장애요 둘째는 누구의 죄를 가름할 판단력도 부족합니다. 핑계가 아니구요. 정말입니다. 판사님! 혼자 내뱉은 많은 생각들이 썰렁한 형사법원의 복도를 맴돌다 철커덩 열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서둘러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이 점심시간이 끝났나보다. 책을 접으며 콩당콩당 뛰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죄인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럴까…
김현숙
<재미수필문학가협회원·수필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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