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확실히 변했다. 작년의 그와 새해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전투적이었던 보수 공화당 ‘정치가’는 사라지고 반대 진영에도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중도적인 ‘우리들의 주지사’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은 돌아오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그의 변신에 지난해 필사적으로 대결했던 민주당조차 놀란 표정이다. 그는 새해 첫주 주정연설에서 2,220억달러 규모의 기간시설 확충 10개년 계획안을 제시했다. 더구나 재원중 680억달러는 공채 발행으로 충당하겠다고 한다. ‘버는 만큼만 쓰자’를 강조하며 예산삭감을 단행했던 그가 빚더미를 지고 새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낙태권 지지의 기수인 민주당 인사를 비서실장으로 채용했는가하면 최저임금 인상, 주립대학 학비 동결등 민주당 이슈를 거리낌없이 끌어안고 나섰다.
당연히 공화당내의 반발이 거세다. ‘배신’이라며 분노한다. 11월 주지사선거에서 당의 공식 지지를 철회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대신 인기 스타 멜 깁슨을 추대하자는 제안도 단기간에 1만명이상의 서명을 얻어냈다(웹사이트도 마련되었지만 깁슨 쪽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아 주춤한 상태다) 지난 주말 샌호제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공화당 컨벤션에서도 반 슈워제네거 분위기는 역력했다. 지도부의 만류로 슈워제네거 비난결의안은 간신히 잠재웠으나 무늬만 보수인 그를 ‘우리가 왜 따라야하느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이같은 반발에 대한 슈워제네거의 태도는 시큰둥하다. 컨벤션에서도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달래는 대신 ‘초당적’ 내용의 스피치를 끝내곤 바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극우 보수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경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물론 11월7일의 재선거다. 그의 재선을 힘겹게 하는 장애 요소는 크게 세가지다. 하락한 인기, 바닥난 자금, 공화당의 분노. 문제는 이 세가지를 함께 개선하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전반적인 지지도를 끌어 올리려면 공화 핵심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고 공화의 분노가 만연되면 기금 확보에 차질이 생긴다. 적절한 수위를 조절하여 균형을 잡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93년 개봉한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가 최대 실패작으로 판명난후 배우 슈워제네거가 취한 조처는 에이전트와 홍보팀의 전원 교체였다. 지난해 11월 특별선거에서 참패한후 주지사 슈워제네거 역시 스탭을 전원 교체했다. 그런데 재선을 겨냥한 새로운 팀의 면면이 흥미롭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혼성팀이다. 그의 정치생활에 깊숙이 관여된 부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새 비서실장 수잔 케네디는 민주당이고 이번에 새로 기용된 재선 캠페인 참모들은 거의 부시 재선팀에서 스카웃된 열성 공화당원들이다.
밖에서 보기엔 이해하기 힘든 ‘적들의 동거’이지만 막상 본인들은 ‘슈워제네거 재선’이라는 공동의 목표만을 추구한다며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극우 보수파의 분노를 감수하고라도 온건 중도파 유권자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들 전략의 근간이다.
요즘 캘리포니아의 정치 성향은 블루에서 퍼플로 변해간다고 한다. 민주당 파란색과 공화당 빨간색의 중간이 보라색, 퍼플이다. 중도파 유권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의미다. 양당 내에도 골수 아닌 온건 성향 당원이 상당수다. 결국 당락을 결정하는 스윙보트는 중도파 유권자다. “보수 우파들의 공격이 심해질수록 중도파에게 어필하니 손해날 것 없다”는 것이 새 아놀드 팀의 주장이다.
공화당의 분노가 슈워제네거 정면 거부로 연결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당의 주지사 후보들은 아직 무명에 가까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러니 민주당이 장악한 새크라멘토에서 공화당에겐 슈워제네거가 최선의 희망이다.
슈워제네거의 변신에 공화당이 분노한다면 못지않게 민주당은 난감하다. 장기적 기간시설 확충으로 ‘캘리포니아 드림을 함께 이루자’며 협력을 청해오는 주지사의 손길을 잡을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것이 민주당 의회의 입장이다. 잡으면 공화당 주지사의 재선을 돕게 될 것이 분명하고, 뿌리치면 평소 자신들이 주창해온 정책들을 외면하며 화합정치를 거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선거는 8개월 남았다. 여러 변수가 반전을 가져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한편 금방 간다. 이미 슈워제네거는 재선진영의 전열정비를 끝내고 ‘모든 주민들을 위한 주지사’가 되겠다고 호소한다. 우리도 ‘모든 주민’에 포함될 수 있도록 주지사 선거에 맞춰 한인사회 어젠다를 정리해야 할 때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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