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만들기는 포도를 수확하는 일부터가 아니라 포도나무를 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만큼 토양과 포도나무의 재배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전체 조건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와인양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의 순서는 1. 지리학적 위치 2. 토양 3. 날씨 4. 포도나무 5. 양조과정이다.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이 생산되는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을 예로 들어보면 ▲남서쪽 대서양 연안, 지롱드 강가에 위치해있다는 지리학적 위치 ▲석회암 위에 자갈, 진흙 또는 모래로 구성된 척박한 땅에 배수가 잘 되는 토양 ▲북극과 적도사이의 중간 위도(북위 45°부근)에 위치해 온화하고 습도가 높으면서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날씨 ▲좋은 열매를 맺는 우수한 포도 품종 ▲수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섬세한 양조과정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 최상급 프리미어 와인을 빚어내는 것이다.
▲배수가 잘 되는 척박한 토양일수록 포도 재배가 잘 된다.
포도 수확연도 일컫는 ‘빈티지’
해마다 다른 기후로 달라져
유명 산지 어딘지 알아두도록
나파 밸리가 그 다음 우수한 레드 와인 생산지로 각광받는 이유는 지리학적으로, 또한 날씨와 토양이 보르도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보르도와 같은 위도 상에 위치한 워싱턴 주에서도 좋은 레드 와인이 빚어진다.
이처럼 와인에서 가장 중요한 재배환경(위치, 토양, 날씨), 즉 자연환경을 통틀어 ‘테루아’(terroir)라고 부른다. 이 테루아에 따라 각기 다른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기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도 보르도에서는 카버네 블렌드, 브루고뉴에서는 피노누아, 샤블리는 샤도네, 론 지방은 시라와 그레나슈, 알사스는 리즐링, 루아르에서는 소비뇽 블랑 등이 유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 테루아 중에서도 위치와 토양은 바꿀 수 없는데 반해 해마다 달라지는 조건이 있다. 기후가 그것으로 그해 강우량은 어땠는지, 어느 달에 비가 많이 왔는지, 날씨는 더웠는지, 서늘했는지, 건조했는지, 습했는지에 따라 포도의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봄철(4월)에 서리가 내리거나 수확기(9월)에 비가 오면 그해의 포도 작황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은 1991년 4월의 냉해로 포도 작황을 50%나 망쳤고, 바롤로와 바바레스코 와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에몬트 지역은 2002년 9월 몰아친 폭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중가주 멘도시노에서도 2001년 4월 최악의 봄서리가 내려 수백만달러의 손실이 있었다.
이 외에도 포도나무들을 얼마나 촘촘히 심었는가, 가지치기를 얼마나 잘 해주었는가에 따라서도 열매의 당도가 달라질 뿐 아니라 땅의 경사가 어느 정도여서 열매가 햇볕을 어떤 기울기로 받았느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와인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음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니 세계 어디에서도 100% 똑같은 와인은 나올 수가 없으며, 바로 옆 포도밭에서 재배한 와인도 맛이 다른 것이다.
한편 기후에 따른 변화로 같은 와이너리에서 만든 똑같은 이름의 와인도 매해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를 구분할 때 쓰는 용어가 빈티지(Vintage)다. 포도 수확연도를 일컫는 빈티지는 나라와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와인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산지의 좋은 빈티지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보르도의 경우 1990, 1998, 2000, 2003년이 유례없이 좋았고, 부르고뉴는 1990, 1997, 1999, 2002년이 우수했으며, 이태리 피에몬트는 1990년, 북가주 레드 와인은 1994, 1997, 2001년이 훌륭했던 빈티지로 평가된다.
근래에 와서 포도나무 재배와 와인 제조법에 첨단과학기술이 도입돼 빈티지의 차이가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자연환경이라 와인 애호가들에게 빈티지는 와인 선택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포도주 양조의 역사는 8,000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고대의 와인메이커들도 이러한 빈티지의 차이를 알았던 것 같다. 로마의 과학자 플리니(Pliny the Elder)가 기원전 121년이 ‘최고로 우수한 해였다’고 기록한 데서 최초의 빈티지 역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와인에 대한 인류의 열정은 불가사의할 만큼 오래 지속되고 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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