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교관이 25일 워싱턴을 떠난다. 주미대사관의 최병구 총영사다. 그의 귀임이 유달리 관심을 끄는 건 행선지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로 복귀하는 그에겐 아직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관례대로라면, 곧 옷을 벗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그래서 이 외교관을 보내는 워싱턴 동포사회의 마음은 착잡하다.
최병구 총영사는 2004년 9월 부임했다. 그의 신상이 공개됐을 때 동포사회는 불가사의해했다. K 대학이란 학력 때문이다. 아마 ‘진학’ 잡지를 열독한 세대는 기억하겠지만 서울의 서대문 어디에 위치한 야간 대학이다. 당연히 S대나 Y대 아니면 K대를 생각했을 동포들의 상식이 빗나간 것이다.
워싱턴 총영사 직은 외교부 내에서도 엘리트 코스로 불린다. 2-3급의 공사 참사관 직급이지만 유종하, 반기문 두 장관을 배출했다. 워싱턴이란 위치 때문에도 외교관이라면 한번쯤 탐내는 자리다. 1970년 주미대사관에 총영사 직이 신설된 이후 모두 19명이 거쳐 갔다. 대부분 앞서의 명문대 출신이었다.
재임중 그는 작은 몸을 이끌고 행사장마다 찾았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동포 단체가 없을 정도였다. 역대 총영사들이 눈길을 제대로 주지 않던 소외된 이방지대에도 그의 발길은 닿았다.
워싱턴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서옥자 회장은 “지난 7년간 정부 도움 없이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며 “최 총영사가 처음으로 관심을 갖고 후원금까지 전해주며 격려해 가슴 뭉클했다”고 말했다.
쉬어야 하는 주말도 그에겐 없었다. 그가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해주는 동포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웃었다. 밝은 낯으로 동포들을 대하고 웃음으로 먼저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포들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흥사단 이형주 회장의 표현처럼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외교관의 전범이었다.
총영사로서 그에게 주어진 다른 역할은 영사업무다. ‘영사민원 서비스’를 2005년 제1의 혁신과제로 정한 외교부의 정책을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따랐다. 직원 친절교육, 순회 업무 강화, 라디오를 통한 민원 안내 도입, 전자민원실의 효과적 운영... . 직원들 입에선 단내가 쏟아졌지만 그의 문턱 낮추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외교부는 지난해 말 주미대사관을 혁신 우수 공관으로 선정했다. 또 재외국민 대상 영사민원 서비스 만족도 조사에서도 51개 공관 중 최상위를 차지했다. 그와 직원들의 노력이 평가받은 것이다.
최 총영사는 말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오랜 권위적 관행이 깨지고 직원들에도 서비스 정신이 완전히 정착될 것 같습니다.” 그의 다짐은 불행히도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2006년 벽두, 돌연 그는 하마(下馬) 통보를 받았다. 임기 3년을 반밖에 채우지 못했지만 아무도 최 총영사가 도중하차해야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보직도 받지 못한 채 귀국하는 걸 알게 된 워싱턴 동포사회는 술렁대고 있다. 그의 낙마의 배경에 대한 설왕설래도 쏟아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고 있는 유력 정치인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란 설이 관심을 끈다. 주인공은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이다.
지난해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민주 평통 주최 통일음악회에 정 장관이 참석했을 때 재향군인회 회원 수십 명이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정 장관의 제주도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동포사회에서는 이 시위를 막지 못한 ‘죄’를 낙마 이유로 꼽는다. 어떤 이들은 외교부 수뇌들이 알아서 처신했다는 ‘한국적 상식’의 잣대도 들이대고 있다. 오비이락 격이지만 정 장관의 보좌역을 한 외교관이 신임 총영사로 부임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이 정치적 혐의가 사실이라면 참여정부의 인사혁신 시스템은 머나먼 변방에서부터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 ‘공정성에 기초한 효율적인 인사제도’ 구축. 이 정부 인사정책의 핵심은 다시 권력과 학벌과 지역이란 전근대적 이유에 의해 불안한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최 총영사가 부임했을 때 동포들이 반긴 것은 신상필벌의 원칙과 능력, 전문성에 의존하는 새로운 인사정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학벌과 출신이란 연고 없이는, 뒤를 봐주는 ‘빽’ 없이는 출세할 수 없는 모국의 잘못된 풍토가 사라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지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에서 ‘외교’에 관한 최 총영사의 능력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펴낸 ‘한국 외교의 도약’ ‘외교, 외교관’이란 두 권의 실전적 외교 지침서에서 이 외교관의 노력과 성실함을 짐작할 뿐이다.
또한 많은 엘리트 외교관들이 총영사 직을 ‘본격적인 외교’를 위한 징검다리로 여기며 임기를 때울 때 그는 동포사회에 눈높이를 맞추고 정열을 쏟았다. 이는 외교에 대한 그 나름의 지론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미국인 그것도 백인을 만나야 진짜 외교를 하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외교는 각 동포들을 포함한 총체적 방식으로 접근해야 더 효과를 낼 수 있는 겁니다.”
외교부의 이번 인사는 많은 의구심을 들게 한다. 사정이 이러니 최 총영사가 퇴진할 합당한 이유를 아직 찾지 못한 동포들은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동포사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근무해도 점수를 따지 못한다면 어느 외교관이 동포 영사 업무에 정력을 쏟겠는가?” 동포사회를 위해 일한 외교관을 배척하는 외교부의 무원칙한 인사정책을 질타하는 한 단체장의 목소리다.
공정한 인사의 룰은 있는가? 외교부에 묻고 싶다.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