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어머니가 새해 연하장을 보내주셨다. 손수 그리신 대나무 사군자 그림이다. 수묵 대신 녹색물감을 쓰셨는데 한겨울 대의 푸름이 드러나게 농담(濃淡)을 잘 살리셨다. 여백에 먹으로 쓰신 한자와의 조화도 편안하다. “죽 청풍 자훈(竹 靑風 自薰)”이라. 소리내어 읽으니 대숲에서 맑은 바람이 훈훈하게 이는 듯 하다. 청풍, 어머님의 새 아호다. 당신의 본관인 청풍 김씨에서 따왔다고 하신다.
문득 옛 글이 생각난다. 어느 산골에서 어머니는 장에 나뭇짐을 팔러 간 아들을 종일 기다리셨다. 석양 무렵이 되도 오지 않자 동구 밖까지 몸소 나가 서 계신다. 멀리 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스름에 보이자 아예 나무 위에 올라가 바라보신다.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木)위에 올라서서(立) 바라보시는(見) 애틋한 사랑의 모습이다. 여기에 견줄 말이 효(孝)이다. 아들은 장에서 어머니 좋아하시는 생선 반찬을 사들고 고갯마루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아들(子)이 노모(老)를 지게에 태우고 집으로 정겹게 돌아오는 모습이 효이다.
남가주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뵌지도 꽤 오래 되었다. 열 여덟에 홀홀 단신 집을 떠난 어머니는 뿌리가 없음을 평생 아파하며 사셨다. 원산 루씨 고녀를 마치자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을 오셨는데 곧 삼팔선이 그어졌다. 그 뒤론 부모님을 다신 뵙지 못하셨다. 학교를 마치자, 어머니는 대학에서 가르치시던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행복한 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혼 일년만에 육 이오가 터지고 뿌리는 또 꺾기고 말았다.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이었다.
만삭인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넋이 나간 채 헤매었다. 몇 일 후에 짧은 전갈이 왔다. 서대문 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어느 청년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꼭 돌아올 테니 걱정 마시오. 아들을 낳으면 희망 희, 메 봉(峰)자를 쓰고, 희망을 잃지 마오”
새 색시였던 어머니가 이제 77세 희수(喜壽)를 맞으신다. 그 동안 나를 희망 삼아 억척같이 사신 세월이었다. 어머님이 고민 끝에 30대에 재혼을 하셨는데, 아들하나 잘 키우려는 집념 때문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당신께선 본래 젊어서부터 글도 잘 쓰시고, 고운 소프라노로 노래도 잘 하셨다. 그런데 내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남들 앞에 드러나는 게 싫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어디론가 뽑혀 가실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아셨던지 당신의 재능을 가꾸시는 걸 보지 못했다. 조금 여유가 있어도 자식들을 위해 다 내놓으셨다. 철나서도 어머니의 재능들을 좀더 가꾸시도록 격려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이 늘어났다. 우리 사 남매의 화목한 가족의 뿌리가 뻗어나고 있다. 이젠 당신 슬하에 손주들만 여덟으로 늘어났고 막내 손이 대학을 갈 만큼 컸다. 모두 할머니의 젖과 땀을 먹고 자란 덕이다.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인데 작년에 첫 가족의 이별을 맛보았다. 당신의 큰사위가 세상을 뜬것이다. 50 갓 넘어 갑자기 병을 얻어 가고 말았다. 어머니는 말을 잃으셨다. 오랜 세월 공들여 지켜온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듯 슬픔에 잠기셨다. 그 때 누군가가 동양화를 권하였다. 어머니는 붓으로 점하나, 획 한줄 긋는 법부터 배워가며 정신을 모으셨다. 그러면서 일취월장해 가는 그림솜씨 속에서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지금 보석 캐듯 발견하고 계신 것이다.
지난 달, 작품 20여 점을 모아 동우회 분들과 전시회를 하셨다. 내 눈엔 어머니의 작품이 단연 돋보인다. 친구들이 돈을 내고 세 점이나 사갔다고 했다. 얼마 전엔, 큰아이가 그린 백여 편의 정밀삽화를 실은 외과수술교과서가 시카고에서 출판되었었다. 의대 재학시절부터 틈틈이 펜화로 장기수술 과정을 그려왔는데 사진보다 사실감이 더하다고 채택된 지 이년만에 빛을 본 것이었다. 어머니는 장손의 등을 두드리며 “이 청풍 김씨, 할미의 재능이 네 몸 속에 흐르는 걸 잊지 마라”시며 흐뭇해하신다.
어머니는 오늘도 열심히 붓을 놀리신다. 앞으로도 계속 당신 속에 숨은 재능을 찾아 갈고 닦는 기쁨을 누리며 사시리라 싶다. 소녀처럼 홍조를 띄고 행복해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도 청풍 수하에 들어 산수화나 배워볼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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