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비상사태가 아니고서야 대통령의 연설은 지루한 것이 당연하다. 엊그제 부시의 국정연설은 조금 더 지루했다. ‘강한 미국’을 역설한 대외정책은 지난 5년간 귀아프게 들어왔던 것이고 국내용 민생 현안도 백화점식으로 빠짐없이 짚기는 했지만 마음에 와닿는 현실적 해결책은 찾기 힘들었다. 이 지루한 와중에서도 ‘재미’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 양당의원들의
상반된 반응은 흥미로웠다. 51분간의 연설중 나온 64차례 박수가 확연히 달랐다. 소셜시큐리티 개혁안의 실패를 인정했을 땐 민주당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냈고 이라크전의 정당성을 옹호할 땐 공화당만 일어나 열광하는 것이 볼만했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이라고 무조건 열광하는 마음일 수는 없다. 특히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의원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새출발을 다짐하는 부시 어젠다에 편승할 것인가, 지지도가 하락한 부시에 등 돌리고 홀로서기를 감행할 것인가…국정연설을 신호탄으로 아직 10개월이나 남은 2006년 중간선거의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간선거는 투표율이 낮다. 대통령을 뽑는 대선과 달리 보통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볼 때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금년처럼 집권여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 중간선거의 결과가 오래 계속되는 파장을 일으킨다. 카터 재임시 중간선거가 그랬다. 무능한 카터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던 1978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새로운 기반 뉴라이트가 급부상했고 이 새로운 보수의 물결은 2년뒤 레이건의 승리를 몰고왔다.
현재까지 나타난 정치기류는 금년 가을 민주당의 승리를 점치게 한다. 들뜬 민주당 일각에선 2006년 의회를 장악하고 2008년 백악관을 탈환하자는 성급한 결의까지 오가고 있다. 이같은 바람의 근거는 무엇보다 하락하는 부시의 지지도다. 워터게이트 직후의 닉슨을 제외하곤 전후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낮다. 게다가 백악관과 상하 양원에 이어 이번 대법원까지 몽땅 공화당이 장악한 것도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원하는 국민의 눈에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전에 대한 좌절과 함께 6년째 접어드는 부시 백악관에 대한 싫증,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엔 민주당 후보를 뽑겠다’가 54%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38%보다 훨씬 높다.
획기적 반전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 몇 달 당론에서 이탈하며 부시와 거리두기를 애쓰는 공화당 의원들이 속출할 것이다. 이번 국정연설도 이처럼 잔뜩 흐린 중간선거 전망을 의식한 치어리딩인듯한데 그 효과는 아직 불분명하다. 민심을 잡을만한 에너지와 교육, 헬스케어 이슈등을 제시했지만 그 실행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현실 모르는 환상’‘공허한 약속의 나열’이라고 민주당 중진들은 비아냥댄다. 천문학적 재정적자를 앞으로 3년내에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하는 부시가 과학교육이나 대체 에너지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지원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나는 아직 건재하다고 외쳐도 레임덕 대통령의 한계 또한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집권당을 바꾸게 하는 것은 도전자에 대한 희망보다는 집권자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허위정보를 근거로 시작하여 수천명의 미군을 희생시키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라크전, 정부의 무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카트리나 대처, 의회의 각종 불법 스캔들, 미로처럼 복잡한 메디케어 처방약 플랜…민주당은 이번 중간선거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부정적 평가가 내려진 부시의 국정을 심판하는 국민투표로 몰아갈 것이다.
부시의 국정에서 한가지 긍정적으로 살아남은 이슈가 ‘안보’다. 부시의 넘버원 브레인인 칼 로브는 가을선거의 주 전략이 ‘안보’를 주제로 한 양극화 논쟁이어야 한다고 공언한다. 선동적 이슈가 있어야 보수층이 결집해 공화당 지지 투표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부시 역시 국정연설에서 민주당을 향해 선의와 상호존중으로 협력하자고 화해의 제스추어를 보이는 한편으로 ‘영장없는 도청 허용’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알카에다의 사생활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민주당을 찍어라’는 식으로 보수정서 불지피기의 한몫을 담당했다.
물론 어느 선거에서나 전략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올해의 경제가 나빠지지 않는다면, 이라크의 내정이 안정되어 미군들의 철수가 빨라진다면 그래서 부시의 지지율이 올라간다면 부시의 가시밭길은 언제라도 꽃길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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