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후배가 친구와 함께 나물을 캐러 우리 산장에 왔다. 나는 나물 같은 것은 없는 곳이라 했더니 선배 눈에는 안 보일 거라며 곧장 언덕으로 가서 마른풀을 헤치며 플래스틱 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보니 야생 갓과 씀바귀풀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구부리고 앉아 재빠른 손으로 나물을 캐며 깔깔대는 그 웃음 속에는 처녀적의 추억이 깃들여 있었다. 현제명의 ‘나물 캐는 처녀’라는 노래가 절로 터져 나왔다.
우리 산장은 캐나다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 RV, 즉 집 차 소유자들과 유럽 여행자들이 RV를 빌려 미 서부여행 중에 들르는 곳이다. 그래서 해발 3,000피트라는 높고 외딴 산중에 있으면서도 산 속 같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갇혀 사는 것 같지만 세계 각국 사람들과 항상 어울릴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공휴일이면 한인들도 몰려 와서 며칠씩 지내는데 그럴 때는 한인인 줄로 착각하며 떠들다가 타민족 손님들의 눈치를 볼 때도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처럼 얼굴 피부색이나 문화가 달라도 사는 일이나 자연에 대한 느낌은 일치해서 만나는 즉시 친구가 된다. 특히 날씨가 좋을 때면 모두 행복해 진다. 서정이 무엇일까? 아름다운 산천초목으로 행복을 느끼는 마음과 고운 사람들과 마음으로 주고받는 말이 아닐까.
보랏빛으로 물든 구름 사이로 붉게 타는 석양을 보며, 옛적 인디언 북소리의 여음을 타고 둥둥 떠오르는 달, 아가의 눈빛 같은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달이 지면 산 안개 속에서 부화되는 밤의 갸륵함이 풀 이슬에 보석처럼 반짝일 때면 새 희망 품고 나그네들은 집 차를 몰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엄숙한 새벽으로 몸과 마음을 씻고 어제를 정리하고 신발 끈을 조이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도 하지만 “남은 여생 잘 지내기를” 하는 인사를 하며 헤어진다. 이렇게 지난해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하나씩 칩들을 나의 뇌 세포에 새겨놓고 그들과 헤어졌다.
특히 지난여름에는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한결같이 광대한 미국의 크기를 경이로워 했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이리 산장을 유지하느냐 라며 우리 산장을 5번 국도의 ‘오아시스’라고 칭찬도 한다.
이제 나는 그들의 영어 발음으로 우리말 지방 사투리를 분별하듯 출신국을 짐작한다. 그들은 선진국 국민답게 대체로 규율을 잘 지키고 예의 바르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여행 중 불순한 일기까지 추억으로 삼고 일상에서의 탈출과 색다른 경험을 만끽했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이 아닌 여행지의 특징을 아름다음으로 여긴다. 그렇다. 진귀한 것을 보려면 박물관에 가야하고 안락한 방을 원하면 고급 호텔로 가야 한다.
해가 바뀌니 우리 산장에 다녀간 모든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리워진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다며 가는 곳마다 청소를 하며 우리 산장에 와서도 일주일 내내 일손을 놓지 않던 오하이오에 사는 프랭크 부부, 전기 기술자인 킬레먼트씨는 사랑하는 아내의 같은 한인의 산장에 왔다고 자기 집인양 전기시설을 돌아보며 고쳐 주고, 또 RV로 미 전국을 다녔는데도 RV 팍에서 한인을 만날 수 없었는데 한인이 경영하는 RV팍에 와서 너무 기쁘다며 오히려 날 보고 고맙다고 꼭 성공하라는 당부를 하던 70세의 김 선생님, 자기들 집 지을 동안 몇 달을 한 식구같이 지낸 노란 머리 바이얼리니스트 힐 여사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환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특히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 재향군인 할아버지들, 그 중에서도 인천 상륙작전에서 다쳤던 다리를 절며 “맥아더 장군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던 스미스 할아버지가 더 기다려진다. 오늘이라도 참전용사들이 오면 또 불고기, 갈비, 잡채로 대접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나물들이 보여지지 않았을까. 병풍같이 둘러쳐진 우리 산언저리를 바라보며 반성했다. 나는 자연을 자연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업장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정서가 이래서 되겠는가. 이 봄엔 나물을 캐서 건강식도 하고 영혼이 맑아지는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과 백석, 윤동주의 시를 더 많이 읽으며 내 서정의 빈곤을 채워야겠다.
이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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