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샤이보처럼 죽고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5년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 지난해 4월 급식튜브 제거로 숨진 샤이보는 미 전국을 뜨거운 안락사 논쟁 속으로 몰아넣었었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했던 보수 우파건 진보 좌파건,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이보가 아닌, 자기 자신의 경우엔 기계에 매달린 혼수상태로 목숨을 유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도 95%가 샤이보처럼은 살기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82%는 불치의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 병원 아닌,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 평화로운 마지막을 맞고 싶다고 했다. 극한의 고통이 오면 자살할 수 있는 극약처방을 받을 권리를 지지한다는 여론도 70%에 달했다.
그러나 안락사를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목소리는 높고 집요하다. ‘생명문화’를 강조하는 부시 집권이후 더욱 그렇다. 엊그제 연방대법원의 안락사 지지판결이 내려지자 이들은 연방의회에서의 격돌을 다짐하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또 한번의 뜨거운 생명윤리 논쟁을 예고한 셈이다. 자신은 ‘품위있게’ 죽고 싶지만 타인의 안락사는 리버럴한 생명경시이므로 결사적으로 막아야겠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7일 연방대법원은 오리건주의 안락사허용 법안을 간접적이지만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1997년부터 시행된 이법안의 정식명칭은 ‘품위있는 죽음에 관한 법(Death With Dignity Act)’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불치병 환자에게 의사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보수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딛고 오리건주 주민투표에서 2번이나 통과된 법안이다.
법정투쟁은 2001년 부시행정부 내에서도 강경보수윤리주의자인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장관이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약품의 처방은 정당한 의료목적을 위해서만 시행되어야한다“는 연방법규를 어겼다며 자살보조는 정당하지 않으므로 안락사 지원 의사의 약 처방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오리건주는 연방정부의 월권행위라며 제소했고 5년의 긴 법정투쟁 끝에 결국 승소한 것이다.
그동안 이법의 존속을 위해 고통을 개의치않고 증언대에 섰던 20명 가까운 환자들은 이제 4명을 제외하곤 모두 사망했다. 생존자중 한명인 60대 암환자의 첫 소감은 “우린 이겼다”였다. 정치가, 판사, 사회운동가들의 간섭을 받지않고 품위있게 죽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게 되어서 기쁘다고 그는 불치의 환자 같지 않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참기 힘든 고통이 엄습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당하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는게 두려울 때 권총자살이나, 투신자살 같은 끔찍한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있어 정말 마음이 놓인다는 뜻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대법원이 안락사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 케이스엔 두가지 이슈가 담겨있다. 내면적으로는 안락사 허용이지만 외형상으로는 연방과 주의 권력배분이다. 판결문도 ‘의료문제는 각 주의 결정사안이며 연방 법무장관에겐 개입권한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일단은 승리다. 이번 판결로 다른 주에서도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입법시도가 활발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혼수상태 환자의 생명보조 기기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는 대부분의 주에서 허용되고 있지만 약물투여로 불치환자의 자살을 돕는 적극적 안락사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허용하는 주는 오리건뿐인데 버몬트와 함께 다음 후보로 꼽히는게 캘리포니아주다. 캘리포니아의 안락사 허용법안은 92년 주민투표에 부쳐졌다 부결되었고 작년엔 주하원 소위원회에서 통과되었으나 공화당의 거센 반발로 본회의엔 상정조차 못한채 폐기되었다. 금년엔 보다 진보적인 상원에 먼저 올려져 오는 3월 첫 법사위 청문회를 가질 예정이다.
자살보조는 찬성-반대의 이슈일 수가 없다. 안락사의 주된 개념은 타인의 보조가 아니다. 각 개인의 피치못한 선택이다. “내가 평생 그렇게 살아왔듯이 죽을 때도 품위를 지키고 싶다”는 대부분 사람들의 바람이다. 불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어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평화롭게 마감하도록 도와주는 배려 - 그것이 안락사에 대한 바른 시각이다.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기준을 절벽에 선 불치환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무례한 정치가와 이념운동가들의 논쟁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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