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0년 통일 독일의 첫 총선에서 승리한 헬무트 콜 총리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동독출신의 차세대 주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막 당선된 36세의 물리학박사 여성 하원의원이었다. 동독 반체제 운동으로 정치에 입문한지 1년밖에 안되는 그는 앳된 용모와는 달리 침착하면서도 뱃장있고 단호했다. 콜의 마음에 꼭 든 그는 91년 청소년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최연소 각료로 기록을 세웠고 계속해서 환경장관, 기민당의 사무총장 등으로 기용됐다. 당시 서독 정계가 발탁했던 동독 출신의 많은 정치가들이 오래지 않아 밀려난데 비해 그는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1월 독일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했다.
앙겔라 마르켈 독일 총리가 오늘 미국을 방문한다. 백악관의 새해 첫 국빈이다. 부시대통령에겐 상당히 반가운 손님이다.
지난 몇 년간 미국과 독일의 관계는 냉냉하고 껄끄러웠다. 전임 슈뢰더총리가 이라크전쟁을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부터다. 슈뢰더는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과 한편이 되어 사사건건 ‘미국때리기’에 앞장섰고 부시도 ‘동지 아니면 적’ 식의 대외정책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적’인 독일과 프랑스는 워싱턴과 점점 더 멀어졌고 ‘동지’인 영국의 블레어총리는 눈총을 받으며 왕따를 당했고 유럽 속 미국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다.
신임총리 마르켈은 다르다. 공개적으로 친미를 선언했다. 미국과의 관계회복이 그의 정치 공약이다. 그렇다고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방미 며칠전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운영중인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는 폐쇄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예민한 이슈이지만 ‘양국관계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이런말을 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덧붙이기도 물론 잊지않았다.
부드럽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면모는 이미 독일 정계에선 소문나 있다. ‘콜의 양녀’라고 불리울만큼 전폭적 지원을 받은 콜 전총리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의 정계은퇴를 가장 먼저 요구한 사람이 메르켈이었다. 당내에선 배신행위로 여겨졌고 정적도 늘어났으나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가로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가톨릭계 서독 남성들이 지배하는 독일정계에서 개신교도 동독 여성 마르켈은 정계입문 불과 16년만에 정상에 선 것이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그의 세가지 강점을 고속 성공의 원동력으로 꼽는다. 소신을 밀고 나가는 뚝심과 뛰어난 상황 판단력, 그리고 실용주의 노선이다.
독일 국민들이 가장 큰 기대를 걸고있는 부분이 바로 마르켈의 실용노선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실용주의에 근거한 경제회복이다.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자부해온 독일의 경제가 영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업률은 2차대전후 최고인 12%에 달하고 경제성장률은 25개 유럽연합(EU)중 최저인 1%에 머물고 있다. 총리에 오르긴 했지만 마르켈의 정부는 자신이 속한 보수우파인 기민-기사당 연합과 중도좌파 사민당이 불안하게 손잡은 대연정이다. 이 대연정을 얼마나 강력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가에 마르켈의 정치생명과 독일의 내일이 달려있는 셈이다.
마르켈의 성적표는 기대이상이다. 49%로 출발했던 지지도는 60%를 넘어섰다. 진통을 거듭하던 EU예산안 협상도 깔끔하게 중재에 성공, 유럽에서의 리더십도 인정받았다. 유럽정계에서의 영향력과 국내여론의 높은 지지를 등에 업은 마르켈의 미국행 발걸음은 당당하다. 지지도 40%를 밑도는 부시와 마주 앉으면 ‘믿을 수 있는 유럽의 친구’로서 신뢰를 심어주는 한편 양국의 관계개선은 ‘미국 하기 나름’이라는 압박 또한 적지않게 가할 것이다. 2006년 월드컵의 개최국으로 금년 한해 우리의 관심권 안으로도 부쩍 들어설 독일의 여성총리가 워싱턴을 어떻게 ‘점령’할 지 궁금해진다.
여담 한가지. 총리 남편의 별명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훔볼트대학 화학교수인 그가 아내의 정치활동은 자신과 무관하다며 1년에 한번 바그너 오페라 축제를 제외하곤 일체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총리취임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 미국방문엔 동행할 지 그것도 궁금하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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